Chapter 1. 사막에서는 물 한 방울도 귀중한 보고
Chapter 2.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는 뻘소리는 작작하고 그냥 건너라
Chapter 3. 무모함이 도를 넘으면 귀신도 질린대더라
Chapter 4. 남자의 헌팅 대사는 예나 지금이나 발전이 없다
Chapter 5. 바보와 가위는 쓰기 나름
Chapter 6. 잠자는 공주는 원래 변태성욕자의 이야기라죠
Chapter 7. 애들은 모르는 사이에 알아서 자란다
Chapter 8. 참을성도 삼세 번까지
Chapter 9. 나쁜 일은 언제나 한꺼번에 터진다
Chapter 10.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데 정말이긴 한 거냐
Epilogue. 그리고,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다
Chapter 10.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데 정말이긴 한 거냐
봄이 되었다.
"록온!"
겨울 내내 얼마나 잘 잤는지 반들반들하니 윤기가 잘잘 흐르는 알렐루야가 반갑게 달려와 양손을 꼬옥 부여잡았다. 록온은 마주 웃어주었다.
"오랜만이다, 알렐루야."
"좋지 않은 소식이 많이 들려서 무척 걱정했는데……그래도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에요. 아, 하지만, 안대가……."
"아냐아냐. 눈은 멀쩡해. 한동안은 직사광선에서 눈을 보호해야 된대서 하고 있을 뿐이야."
록온은 오른쪽 눈을 감싼 검은 가죽 안대를 톡톡 두드렸다.
의사가 눈을 정밀 진단한 후 안대 착용을 권장했을 때 록온은 남자의 안대라면 역시 이거라고 생각하고 실행에 옮겼으나, 정작 착용한 모습을 보이자 랏세는 단지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논평을 거부했고, 일부는 배를 쥐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고, 일부는 뭔가 트라우마라도 자극당했는지 머리를 쥐어뜯으며 애X렌이 어쩌고 미X시마가 어쩌고 중얼거리는가 하면, 그레이엄은 나의 공주는 설령 누더기를 걸쳐도 가련하고 아름답다고 주먹을 부르쥐고 역설하였고, 카타기리가 친근히 어깨를 두드리며 붙임성 좋게 한다는 말은 이랬다. 센스는 꽝이구나, 아하하하. (190이 넘는 키로 포니테일이 달랑대는 공대남이 할 말이냐!?)
그리고 라일은 꽃같이 상냥한 미소를 짓고 말했다.
"처음 뵙는 분인데, 누구시죠?"
"야!"
이어 세츠나는 외면하고 티에리아는 코끝으로 비웃는 등 조낸 참람한 스코어를 기록한 안대를, 그래도 혹여 알렐루야만은……하고 록온은 실낱같은 기대를 품었더랬으나, 안됐지만 알렐루야 아우다 아부 타이는 희대의 분위기 파악 못하고 입 간수 못하는 남자였다.
알렐루야는 상큼하고, 천진하고, 발랄하게 말했다.
"근데, 정말 바보 같네요, 그 안대!"
"바, 바보 같……?!"
"예, 진짜 이상해요! 해적선장도 아니고, 그게 뭐예요, 촌스럽게!"
"초, 촌스……!!"
아아, Et tu, Brute8) .
‡ ‡ ‡ ‡ ‡
늦겨울부터 개시된 대규모의 다마스쿠스 공략전에 참전하기 위해 록온은 그레이엄과 사흘 내내 전쟁에 가까운 입씨름을 벌여야만 했다. 설득하고 회유하고 협박하고 애교를 떨고 막판에는 본의 아닌 미인계까지 동원해 가까스로 전선에 오는 데는 성공했고 데라에서의 사건이 뭔가 중간 과정은 쏙 빼놓고 와전되는 바람에 아랍인들에게는 더더욱 뜨거운 환영을 받았지만, 제일 큰 장애물은 역시 세츠나와 티에리아였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걱정 끼쳐서 정말정말 죄송합니다.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하겠습니다. 다시 받아주세요. 어색하게 에헷 웃으며 싹싹 비는 록온에게, 티에리아는 싸가지 없는 재벌 3세라면 오 나를 이렇게 대한 이는 네가 처음이야……! 라며 팔을 벌리고 달려들 것 같은 강렬한 싸닥션을 불문곡직하고 오른뺨에 날렸고, 세츠나는 손가락을 두둑 꺾으며 조용히 말했다. 이 악물어라, 록온 스트라토스.
맞은 데 또 때리지 않은 건 아이의 그나마 최후의 자비였으리라.
양 뺨이 끝내주게 얼얼했지만, 곧 티에리아가 목에, 세츠나가 품에 매달려 왔으므로 아픈 것도 다 잊었다.
‡ ‡ ‡ ‡ ‡
"세츠나 F. 세이에……아니 세츠나 소란 이븐 엘 이브라힘."
"무슨 일인가, 티에리아 아……아니 파이살 티에리아 이븐 후세인."
"……."
"……."
"……일일이 번거롭군. 이름으로 통일한다."
"동감이다."
"너도 눈치챘겠지. 그 남자, 아무래도 여차직하면 영국군을 때려치고 뛰쳐나올 분위기다."
"점점 대책이 없군."
"만약의 경우에는 흠집을 낸 책임을 지고 신부로 맞이할 예정이지만, 너는 너대로 그게 제 소임이라 여기고 있겠지."
"물론이다, 티에리아."
"그에 대해서는 사실 여러모로 할 말이 많으나, 이야기는 최종장이고 우리끼리 싸우고 있을 지면도 여력도 없어. 그러니……."
티에리아의 안경이 번갯불을 받아 번쩍 빛났다. 하늘은 파랗고 태양은 쨍쨍한 벌건 대낮에 무슨 번갯불인지는 따지지 말자.
"월수금은 네가, 화목토는 내가, 일요일은 손빠른 쪽이 임자인 걸로 타협하지."
"받아들이겠다."
좀 더 서로를 이해하고 한 발짝 가까워진 세츠나와 티에리아가 굳은 악수를 나누려 할 때였다.
"스, 스톱 스톱! 세츠나, 티에리아, 나는? 나는!?"
"있었나, 알렐루야 합티즘."
"전혀 몰랐다, 알렐루야 합티즘."
"와아 뭘까 할렐루야, 세상의 악의가 들려."
알렐루야는 잠시 멍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은따의 폐해에 대한 고뇌에 빠졌지만, 역시 고민하고 있을 여가도 지면도 부족했으므로 정신을 찾고 다시금 항의했다.
"저기, 둘 다 잊고 있는 모양인데, 록온한테 제일 먼저 정식으로 청혼한 사람은 나인걸! 나만 쏙 빼다니 너무하잖,"
"기혼자는 빠져라."
"닥쳐. 지금은 인간과 이야기할 기분이 아니다. 그리고 누구 마음대로 티에리아인가."
"……."
"……."
‡ ‡ ‡ ‡ ‡
"록온! 록온 스트라토스, 큰일입니다! 파이살 왕자님이!"
"왜 그래요 셰리프 나시르, 티에리아한테 무슨 일이라도?"
"장정 허리통만한 통나무를 휘두르며 할렐루야 아우다 아부 타이와 교전하고 계십니다!"
"……예?"
"셰리프 세츠나는 할렐루야의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
"얘, 얘들아! 얘들아─────────!!!"
‡ ‡ ‡ ‡ ‡
다마스쿠스 공략전을 앞두고 열린, 그레이엄 앨런비 에이커 경을 대표로 하는 영국측과 파이살 티에리아 이븐 후세인 왕자를 필두로 하는 아랍측의 영국-아랍 회담은 하마터면 시작도 하기 전에 다음과 같은 일련의 사태에 의해 결렬될 뻔했다.
1. 그레이엄이 세츠나를 보자마자 소년! 자네와 나는 운명의 붉은 실로 연결된 모양이야! 소년! 을 외치며 야수같이 덤벼들었고,
2. 졸지에 중인환시리에 그레이엄의 운명의 소년이 된 세츠나가 날 건드리지 마라 캬르릉크아악 완전방어자동모드로 돌입해 세븐 소드를 뽑았으며,
3. 록온이 그레이엄의 뒤통수를 의자로 후려갈겼다.
"이 로리콤, 쇼타콤, 페도파일, 소아성애자! 우리 애한테 뭔 짓이야!"
"오오, 그건 질투인가 공주!"
"말 나올 줄 알았어. 말 나올 줄 알았다고!"
"걱정 말게나, 소년과 나의 운명은 그대와 나의 운명과는 별개일세! 동양의 고전9)에 따르면 남자와 남자는 파란 실로 이어진다더군! 즉 자네와 나의 새끼손가락 사이에는 운명의 파란 실이,"
"시끄러워 변태!"
록온이 세츠나를 등으로 방어하며 우리 애한테 바보병이 옮으면 책임질 거냐고 그레이엄에게 소금을 왕창 뿌려대고, 머리에 의자가 박힌 그레이엄이 피를 분수처럼 뿜으며 최소한 그대처럼 달콤한 설탕으로 해달라고 항의하고, 세츠나가 록온의 옷자락에 매달려 은은하게 질린 얼굴을 파묻고 있는 사이, 티에리아는 카티 마네킨 경과 진지하고 생산적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협의를 시작했다.
‡ ‡ ‡ ‡ ‡
"에 또……저기, 세츠나 군?"
"뭔가."
"어째서 형아한테 올라타서 옷을 들추고 있는 걸까요……?"
"오늘은 월요일이니까."
"예."
"내 차례다."
"연결이 안 돼!?"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는 옷을 풀어헤치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연약한 부분을 핥아올리는 혀의 움직임이 제법 교묘해 얼결에 으햐악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무리 자기 세뇌를 하려 해도 이쯤 되면 아이의 의도를 모를 수가 없었다.
"저 말이다 세츠나."
"왜."
"난 남자고."
"안다."
"크고 딱딱하고."
"보면 안다."
"너보다 여덟 살이나 많고."
"그것도 안다."
"세상에는 부드럽고 작고 귀여운 여자애가 얼마든지,"
"내가 안고 싶은 건 너뿐이야."
히에에에엑.
초인적인 자제심으로 귓불까지 시뻘개지는 것은 간신히 면했다. 태어나서 이렇게 정열적인 고백을 받아보기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애들은 이래서 안 된다. 항상 곧바르고 직선적이고 너무나 솔직해서, 면역이 없는 지저분한 어른은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적갈색 눈동자가 록온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한 번 보내줬는데도 돌아온 건 너다."
"세츠나."
"잠자코 안겨."
아이의 건조한 목소리에 희미하게 묻어나는 절박한 열기가 홧홧했다. 한순간 에라 모르겠다 내가 깔리는 쪽인데 그냥 눈 딱 감고 휩쓸려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세츠나의 큼지막한 눈과 아직 앳된 얼굴과 가느다란 체구가 눈에 들어오는 즉시 그놈의 천벌 받을 발상은 단숨에 허공으로 날려갔다.
"아아아악 역시 안 돼! 못하겠어! 세츠나, 내려가 내려가! 우리 다시 생각하자!"
"내가 싫은가."
"헉."
미미하게 풀죽은 얼굴로 어깨를 슬몃 늘어뜨릴 줄은. 반칙이었다.
"지금 여기서 그 대사를 카드로 뽑다니 치사하다……! 제발 유럽의 나름 섬세한 감성을 존중해주라. 유럽에선 미성년자랑 동침은 경끼 들릴 죄란 말입니다……!"
"유럽인은 소심하군."
"소심의 문제가 아니야, 소심의 문제가!"
록온은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고, 세츠나의 머리를 토닥이며 타협책을 내놓았다.
"우선 알렐루야만큼만 나이 먹자."
"……."
"그때까지 기다려줄게."
앞으로 지나야 하는 세월을 속으로 헤아려 보고 입이 댓발이나 나와 퉁퉁 부어버린 아이가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록온은 그만 상황도 잊고 푸핫 웃음을 터뜨리며 아이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 대가로 머리카락을 한웅큼 뜯길 뻔했지만.
"──세츠나."
"뭔가."
"내 동생 있잖아."
"라일 디란디 말인가."
"응."
록온은 배시시 웃었다.
"언젠가, 전부 다 끝나면, 세츠나한테도 소개하고 싶어."
세상에 오로지 단 하나뿐인 내 보물을.
세츠나는 눈을 둥글게 떴다.
"틀림없이 그 녀석도 세츠나를 마음에 들어 할 거야. 널 만나고 싶어하기도 했고……게다가, 내 동생이니까."
사랑하는 동생과, 사랑스러운 아이.
모든 것이 끝난 어느 따스한 오후에, 셋이서 정원에 탁자를 놓고, 그와 라일은 홍차를, 세츠나는 벌꿀을 탄 따뜻한 우유를 마시는 상상을 했다.
그건, 정말로 지독하게 달콤한 상상이었다.
세츠나는 록온의 눈가에 가볍게 입술을 눌러댔다.
"기대하고 있겠다."
"응."
록온은 팔을 뻗어 아직은 가녀리기만 한 아이를 껴안았다.
"빨리 커라, 우리 꼬맹이."
"록온!"
겨울 내내 얼마나 잘 잤는지 반들반들하니 윤기가 잘잘 흐르는 알렐루야가 반갑게 달려와 양손을 꼬옥 부여잡았다. 록온은 마주 웃어주었다.
"오랜만이다, 알렐루야."
"좋지 않은 소식이 많이 들려서 무척 걱정했는데……그래도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에요. 아, 하지만, 안대가……."
"아냐아냐. 눈은 멀쩡해. 한동안은 직사광선에서 눈을 보호해야 된대서 하고 있을 뿐이야."
록온은 오른쪽 눈을 감싼 검은 가죽 안대를 톡톡 두드렸다.
의사가 눈을 정밀 진단한 후 안대 착용을 권장했을 때 록온은 남자의 안대라면 역시 이거라고 생각하고 실행에 옮겼으나, 정작 착용한 모습을 보이자 랏세는 단지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논평을 거부했고, 일부는 배를 쥐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고, 일부는 뭔가 트라우마라도 자극당했는지 머리를 쥐어뜯으며 애X렌이 어쩌고 미X시마가 어쩌고 중얼거리는가 하면, 그레이엄은 나의 공주는 설령 누더기를 걸쳐도 가련하고 아름답다고 주먹을 부르쥐고 역설하였고, 카타기리가 친근히 어깨를 두드리며 붙임성 좋게 한다는 말은 이랬다. 센스는 꽝이구나, 아하하하. (190이 넘는 키로 포니테일이 달랑대는 공대남이 할 말이냐!?)
그리고 라일은 꽃같이 상냥한 미소를 짓고 말했다.
"처음 뵙는 분인데, 누구시죠?"
"야!"
이어 세츠나는 외면하고 티에리아는 코끝으로 비웃는 등 조낸 참람한 스코어를 기록한 안대를, 그래도 혹여 알렐루야만은……하고 록온은 실낱같은 기대를 품었더랬으나, 안됐지만 알렐루야 아우다 아부 타이는 희대의 분위기 파악 못하고 입 간수 못하는 남자였다.
알렐루야는 상큼하고, 천진하고, 발랄하게 말했다.
"근데, 정말 바보 같네요, 그 안대!"
"바, 바보 같……?!"
"예, 진짜 이상해요! 해적선장도 아니고, 그게 뭐예요, 촌스럽게!"
"초, 촌스……!!"
아아, Et tu, Brute8) .
늦겨울부터 개시된 대규모의 다마스쿠스 공략전에 참전하기 위해 록온은 그레이엄과 사흘 내내 전쟁에 가까운 입씨름을 벌여야만 했다. 설득하고 회유하고 협박하고 애교를 떨고 막판에는 본의 아닌 미인계까지 동원해 가까스로 전선에 오는 데는 성공했고 데라에서의 사건이 뭔가 중간 과정은 쏙 빼놓고 와전되는 바람에 아랍인들에게는 더더욱 뜨거운 환영을 받았지만, 제일 큰 장애물은 역시 세츠나와 티에리아였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걱정 끼쳐서 정말정말 죄송합니다.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하겠습니다. 다시 받아주세요. 어색하게 에헷 웃으며 싹싹 비는 록온에게, 티에리아는 싸가지 없는 재벌 3세라면 오 나를 이렇게 대한 이는 네가 처음이야……! 라며 팔을 벌리고 달려들 것 같은 강렬한 싸닥션을 불문곡직하고 오른뺨에 날렸고, 세츠나는 손가락을 두둑 꺾으며 조용히 말했다. 이 악물어라, 록온 스트라토스.
맞은 데 또 때리지 않은 건 아이의 그나마 최후의 자비였으리라.
양 뺨이 끝내주게 얼얼했지만, 곧 티에리아가 목에, 세츠나가 품에 매달려 왔으므로 아픈 것도 다 잊었다.
"세츠나 F. 세이에……아니 세츠나 소란 이븐 엘 이브라힘."
"무슨 일인가, 티에리아 아……아니 파이살 티에리아 이븐 후세인."
"……."
"……."
"……일일이 번거롭군. 이름으로 통일한다."
"동감이다."
"너도 눈치챘겠지. 그 남자, 아무래도 여차직하면 영국군을 때려치고 뛰쳐나올 분위기다."
"점점 대책이 없군."
"만약의 경우에는 흠집을 낸 책임을 지고 신부로 맞이할 예정이지만, 너는 너대로 그게 제 소임이라 여기고 있겠지."
"물론이다, 티에리아."
"그에 대해서는 사실 여러모로 할 말이 많으나, 이야기는 최종장이고 우리끼리 싸우고 있을 지면도 여력도 없어. 그러니……."
티에리아의 안경이 번갯불을 받아 번쩍 빛났다. 하늘은 파랗고 태양은 쨍쨍한 벌건 대낮에 무슨 번갯불인지는 따지지 말자.
"월수금은 네가, 화목토는 내가, 일요일은 손빠른 쪽이 임자인 걸로 타협하지."
"받아들이겠다."
좀 더 서로를 이해하고 한 발짝 가까워진 세츠나와 티에리아가 굳은 악수를 나누려 할 때였다.
"스, 스톱 스톱! 세츠나, 티에리아, 나는? 나는!?"
"있었나, 알렐루야 합티즘."
"전혀 몰랐다, 알렐루야 합티즘."
"와아 뭘까 할렐루야, 세상의 악의가 들려."
알렐루야는 잠시 멍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은따의 폐해에 대한 고뇌에 빠졌지만, 역시 고민하고 있을 여가도 지면도 부족했으므로 정신을 찾고 다시금 항의했다.
"저기, 둘 다 잊고 있는 모양인데, 록온한테 제일 먼저 정식으로 청혼한 사람은 나인걸! 나만 쏙 빼다니 너무하잖,"
"기혼자는 빠져라."
"닥쳐. 지금은 인간과 이야기할 기분이 아니다. 그리고 누구 마음대로 티에리아인가."
"……."
"……."
"록온! 록온 스트라토스, 큰일입니다! 파이살 왕자님이!"
"왜 그래요 셰리프 나시르, 티에리아한테 무슨 일이라도?"
"장정 허리통만한 통나무를 휘두르며 할렐루야 아우다 아부 타이와 교전하고 계십니다!"
"……예?"
"셰리프 세츠나는 할렐루야의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
"얘, 얘들아! 얘들아─────────!!!"
다마스쿠스 공략전을 앞두고 열린, 그레이엄 앨런비 에이커 경을 대표로 하는 영국측과 파이살 티에리아 이븐 후세인 왕자를 필두로 하는 아랍측의 영국-아랍 회담은 하마터면 시작도 하기 전에 다음과 같은 일련의 사태에 의해 결렬될 뻔했다.
1. 그레이엄이 세츠나를 보자마자 소년! 자네와 나는 운명의 붉은 실로 연결된 모양이야! 소년! 을 외치며 야수같이 덤벼들었고,
2. 졸지에 중인환시리에 그레이엄의 운명의 소년이 된 세츠나가 날 건드리지 마라 캬르릉크아악 완전방어자동모드로 돌입해 세븐 소드를 뽑았으며,
3. 록온이 그레이엄의 뒤통수를 의자로 후려갈겼다.
"이 로리콤, 쇼타콤, 페도파일, 소아성애자! 우리 애한테 뭔 짓이야!"
"오오, 그건 질투인가 공주!"
"말 나올 줄 알았어. 말 나올 줄 알았다고!"
"걱정 말게나, 소년과 나의 운명은 그대와 나의 운명과는 별개일세! 동양의 고전9)에 따르면 남자와 남자는 파란 실로 이어진다더군! 즉 자네와 나의 새끼손가락 사이에는 운명의 파란 실이,"
"시끄러워 변태!"
록온이 세츠나를 등으로 방어하며 우리 애한테 바보병이 옮으면 책임질 거냐고 그레이엄에게 소금을 왕창 뿌려대고, 머리에 의자가 박힌 그레이엄이 피를 분수처럼 뿜으며 최소한 그대처럼 달콤한 설탕으로 해달라고 항의하고, 세츠나가 록온의 옷자락에 매달려 은은하게 질린 얼굴을 파묻고 있는 사이, 티에리아는 카티 마네킨 경과 진지하고 생산적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협의를 시작했다.
"에 또……저기, 세츠나 군?"
"뭔가."
"어째서 형아한테 올라타서 옷을 들추고 있는 걸까요……?"
"오늘은 월요일이니까."
"예."
"내 차례다."
"연결이 안 돼!?"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는 옷을 풀어헤치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연약한 부분을 핥아올리는 혀의 움직임이 제법 교묘해 얼결에 으햐악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무리 자기 세뇌를 하려 해도 이쯤 되면 아이의 의도를 모를 수가 없었다.
"저 말이다 세츠나."
"왜."
"난 남자고."
"안다."
"크고 딱딱하고."
"보면 안다."
"너보다 여덟 살이나 많고."
"그것도 안다."
"세상에는 부드럽고 작고 귀여운 여자애가 얼마든지,"
"내가 안고 싶은 건 너뿐이야."
히에에에엑.
초인적인 자제심으로 귓불까지 시뻘개지는 것은 간신히 면했다. 태어나서 이렇게 정열적인 고백을 받아보기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애들은 이래서 안 된다. 항상 곧바르고 직선적이고 너무나 솔직해서, 면역이 없는 지저분한 어른은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적갈색 눈동자가 록온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한 번 보내줬는데도 돌아온 건 너다."
"세츠나."
"잠자코 안겨."
아이의 건조한 목소리에 희미하게 묻어나는 절박한 열기가 홧홧했다. 한순간 에라 모르겠다 내가 깔리는 쪽인데 그냥 눈 딱 감고 휩쓸려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세츠나의 큼지막한 눈과 아직 앳된 얼굴과 가느다란 체구가 눈에 들어오는 즉시 그놈의 천벌 받을 발상은 단숨에 허공으로 날려갔다.
"아아아악 역시 안 돼! 못하겠어! 세츠나, 내려가 내려가! 우리 다시 생각하자!"
"내가 싫은가."
"헉."
미미하게 풀죽은 얼굴로 어깨를 슬몃 늘어뜨릴 줄은. 반칙이었다.
"지금 여기서 그 대사를 카드로 뽑다니 치사하다……! 제발 유럽의 나름 섬세한 감성을 존중해주라. 유럽에선 미성년자랑 동침은 경끼 들릴 죄란 말입니다……!"
"유럽인은 소심하군."
"소심의 문제가 아니야, 소심의 문제가!"
록온은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고, 세츠나의 머리를 토닥이며 타협책을 내놓았다.
"우선 알렐루야만큼만 나이 먹자."
"……."
"그때까지 기다려줄게."
앞으로 지나야 하는 세월을 속으로 헤아려 보고 입이 댓발이나 나와 퉁퉁 부어버린 아이가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록온은 그만 상황도 잊고 푸핫 웃음을 터뜨리며 아이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 대가로 머리카락을 한웅큼 뜯길 뻔했지만.
"──세츠나."
"뭔가."
"내 동생 있잖아."
"라일 디란디 말인가."
"응."
록온은 배시시 웃었다.
"언젠가, 전부 다 끝나면, 세츠나한테도 소개하고 싶어."
세상에 오로지 단 하나뿐인 내 보물을.
세츠나는 눈을 둥글게 떴다.
"틀림없이 그 녀석도 세츠나를 마음에 들어 할 거야. 널 만나고 싶어하기도 했고……게다가, 내 동생이니까."
사랑하는 동생과, 사랑스러운 아이.
모든 것이 끝난 어느 따스한 오후에, 셋이서 정원에 탁자를 놓고, 그와 라일은 홍차를, 세츠나는 벌꿀을 탄 따뜻한 우유를 마시는 상상을 했다.
그건, 정말로 지독하게 달콤한 상상이었다.
세츠나는 록온의 눈가에 가볍게 입술을 눌러댔다.
"기대하고 있겠다."
"응."
록온은 팔을 뻗어 아직은 가녀리기만 한 아이를 껴안았다.
"빨리 커라, 우리 꼬맹이."
8"브루투스, 너마저도!"
9그레이엄 경은 <파타리로!>의 열렬한 애독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