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사막에서는 물 한 방울도 귀중한 보고
Chapter 2.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는 뻘소리는 작작하고 그냥 건너라
Chapter 3. 무모함이 도를 넘으면 귀신도 질린대더라
Chapter 4. 남자의 헌팅 대사는 예나 지금이나 발전이 없다
Chapter 5. 바보와 가위는 쓰기 나름
Chapter 6. 잠자는 공주는 원래 변태성욕자의 이야기라죠
Chapter 7. 애들은 모르는 사이에 알아서 자란다
Chapter 8. 참을성도 삼세 번까지
Chapter 9. 나쁜 일은 언제나 한꺼번에 터진다
Chapter 10.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데 정말이긴 한 거냐
Epilogue. 그리고,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다
Chapter 7. 애들은 모르는 사이에 알아서 자란다
"시카고 트리뷴의……요한 트리니티 기자?"
아르무크 계곡의 철교를 성공적으로 폭파시킨 다음날, 당나귀를 타고 캠프에 불쑥 나타난 키 크고 가무잡잡한 피부와 준수한 용모, 칼같이 단정한 수트 차림의 남자가 록온에게 내민 명함에는 그렇게 박혀 있었다.
록온은 명함을 한 번 보고, 싹싹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를 한 번 보고, 눈을 부비고 명함을 세 번 더 확인한 후 물었다.
"본명입니까?"
"본명입니다."
"가명이 아니라?"
"가명이 아니라."
선조와 부모가 똑같이 머레이 장군의 센스를 지녔던 모양이었다. 록온은 합장을 했다. 속으로만.
"근데 시카고 트리뷴이라면……미국이잖아요? 세상에, 고작 영국 장교 하날 취재하러 미국에서 여기까지 왔단 말입니까?"
"모르시는 말씀을. 이만한 대어도 드뭅니다. 터키의 압제에 대항하여 떨쳐 일어난 아랍혁명군. 아랍의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가장 용맹한 전사들의 부족인 하리스와 호웨이타트의 연합을 주도하고 반 년이 넘게 게릴라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존경과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갈색 머리와 녹색 눈의 미청년 장교. 완벽하죠. 뇌주름이 하나인 미국인들이 넋을 놓고 열광할 소재잖습니까."
"어이 당신도 미국인."
록온은 이마에 드리워진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빙빙 꼬면서 한숨을 쉬었다.
"이보세요, 난 미국 친구들이 쌍수 들고 환영할 만한 슈퍼 히어로도 아니고요, 언론플레이엔 흥미도 없고, 하물며 민간인을 동행시키기엔 이 임무는 너무 위험합니다. 미안하지만 돌아가 주,"
"영국군에게서 동행 취재 허가는 받았습니다."
"이봐 사령부!"
"에이커 경은 매우 재미있는 분이더군요. '나의 귀하고 귀한 공주의 아름다움을 세상 만방에 알리는 일이라면 환영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 있겠나!' 라며 흔쾌히 사인을 해주셨습니다."
록온이 그레이엄을 3층이 아니라 30층에서 던져버리지 않은 것을 진심으로 회한하는 사이, 요한 트리니티는 매우 연극적인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덧붙였다.
"사실 특종도 특종이지만,"
"응?"
"무엇보다 난 당신에게 흥미가 있습니다, 록온 스트라토스. ──아니, 닐 로렌스 디란디라 해야 하나요?"
"……! 내 이름을 어떻게……!"
"에이커 경을 통해 자료를 열람했으니까."
"죽인다 이 자식."
"사진보다 실물이 더 미인이라서 기쁘군요. 여기까지 고생스럽게 온 보람이 있었습니다."
"저기, 참으로 열렬한 관심을 보여줘서 저어어어엉말 고마운데 말이죠……!"
록온은 요한의 상완이두근을 사냥개가 여우의 목에 악착같이 이빨을 박듯 다섯 손가락이 다 파고들도록 꾸와아아아아아악 움켜쥐었다.
"──만난 지 20분도 안된 남정네의 엉덩이를 찰지게 주물러대는 이 손은 뭘까나?!"
"이거 실례. 품이 넉넉한 아랍의상으로도 숨겨지지 않는 매혹적인 곡선이기에."
"아니 옷은 왜 벗겨!?"
"사진의 기본은 누드사진이잖습니까."
"꺄아아악 겨……경찰 아저씨! 변태! 변태가! 변태가 여기 있어요오오오오!"
"그리고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왜 그놈의 수트는 핑크색인 거냣!!"
‡ ‡ ‡ ‡ ‡
다행히도 때맞춰 군막에 들어온 세츠나가 요한을 구축(驅逐)하고 반쯤 벗겨진 채 깔려 있던 록온을 구해내긴 했지만, 그 대가로 록온은 무릎을 꿇고 정좌한 채 여덟 살이나 어린 아이에게 엄마가 묘령의 처녀에게 늘어놓을 것 같은 설교를 주구장창 들어야만 했다.
남자는 다 짐승이다, 록온 스트라토스.
‡ ‡ ‡ ‡ ‡
나흘 후의 제말 파샤의 기차 습격 작전도 무사히 종료하였다.
호웨이타트는 뒤집어엎은 기차의 화물은 물론 준마 이백 필까지 얻고 입이 찢어졌으나 (특히 할렐루야는 기차에서 퉁겨나온 트렁크 밑바닥에 용케도 박살나지 않고 남아 있었던 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을 연주하는 화사한 오르골이 마음에 쏙 든 듯 하루종일 붙어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록온은 그놈의 오지랖이 뭔지 아드레날린 과다 분비로 눈이 벌개진 사내들의 열광에 응한답시고 쓸데없이 기차 지붕에 올라가 승리의 춤을 추는 뻘짓을 하다 팔에 총만 맞았다.
오늘 하루도 손해 보는 역할은 건재했다.
‡ ‡ ‡ ‡ ‡
"아야야야야야야야! 세츠나! 아파! 세츠나!!!"
"참아라. 그러고도 남자인가."
세츠나는 무덤덤한 얼굴로 그나마 생채기만 나고 큰 부상은 면한 록온의 팔에 요오드팅크를 좍좍 뿌리고 무자비하게 붕대를 졸라댔다. 세상의 악의가 느껴진다며 체면을 불구하고 징징대는 딱한 어른은 깔끔히 씹고 약상자를 갈무리하는 아이의 옆모습을, 록온은 담요 위에서 뒹굴거리며 바라보다 문득 한 가지를 깨달았다.
"얼레. 세츠나, 키 좀 자랐다?"
"그런가. 재어볼 시간이 없었다."
"안 재어봐도 틀림없어요. 이 형아의 눈썰미는 정확합니다. 적어도 1인치는 컸네."
세츠나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입가에는, <세츠나의 속을 귀신같이 캐치하기>로는 세계 챔피언도 능히 딸 수 있을 록온이나 겨우 알아볼 법한 만족스런 기색이 은은히 감돌았다.
우웃. 록온은 내심 누구한테 향한 건지도 모를 욕설을 짧게 퍼붓고, 늘 하듯이 옆에 붙어 앉은 아이를 답삭 끌어안았다가 매를 벌었다.
팔꿈치를 정통으로 때려박힌 명치를 부여잡고 요에 엎어진 채, 뺨과 이마는 여전히 앳된 곡선을 간직하고 있으되 서서히 청년의 강건한 선이 제법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세츠나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마스투라 우물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 그저 가녀리고 어리게만 보이던 게 엊그제 같은데.
불과 열 여섯에도 이토록 사나이다운 이 아이가 스무 살이 넘고 어른이 되면 어떤 모습이 될까. 눈을 감고 몽상해 보았다. 필경은, 누구나가, 깐깐하고 매서운 티에리아마저도, 반하지 않고는 못 배길 근사한 남자가 되리라.
즐거운 상상을 한동안 마음껏 누린 록온은 두연히, 자리 한 켠을 얌전히 차지하고 누운 새까만 표지의 8절판짜리 얄푸리한 책을 발견하고 눈을 둥글게 떴다. 겉면에는 멋진 은색의 장식체로 Democracy for Kids란 제목에 박혀 있었다. 위쪽으로 고개를 비죽 내민 파란색 책갈피는, 책 귀퉁이를 접지 않도록 록온이 준 것이다.
아, 이게 바로.
약상자를 정리하고 습관처럼 록온에게 붙어 앉는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요즘 공부, 열심히 한다며."
"……."
세츠나는 실쭉하게 고개를 돌려버렸고, 그 몸짓에서 쉽사리 쑥스러움을 읽어낸 록온은 애써 웃음을 깨물었다. 여기서 웃고 말면 아이는 보나마나 제대로 앵돌아질 테고, 그래서 한동안 말도 못 붙이고 눈치만 보게 되는 것은 록온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어때, 민주주의는 재미있어?"
"……그럭저럭."
"혹, 새로운 장래희망은 정치가라던가?"
"아랍인의 국가가 생기면 그때 알려주마."
"우오 대답은 하되 내용은 없는 전형적인 정치가 발언! 세츠나 군 나름 소질 있지 말입니다!"
록온은 거대한 돔에 모인 각 부족의 면면들을, 의제를 진지하게 토론하는 아랍의회를, 그리고 높직한 연단에 올라 근엄하게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는 세츠나를 마음속으로 그려보았다. 웃음이 새어나왔다.
현실이 될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현재의 아랍에는 시기상조일지도 모르고, 격심한 반대에 부딪혀 좌초할지도 모르고, 심지어는 끝끝내 아랍인의 국가를 보지 못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아이는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나을지도 모르는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전부 헛수고가 될 수도 있음을 이해하고 그걸 감수한 채, 먼저 스스로가 변하고자 묵묵히 노력하고 있다. 벌써부터 손때가 묻고 책장이 너덜거릴 만큼 책을 읽고 읽고 또 읽어가면서.
아아, 사랑스럽지 않은가.
록온은 거의 충동적으로 말했다.
"세츠나는 분명히 좋은 남자가 될 거야. 내가 보증할게."
손을 뻗어, 커다란 적갈색 눈동자를 더욱 크게 뜬 아이의 뺨을 쓸어주었다.
"빨리 커라, 우리 꼬맹이."
세츠나는 록온을 걷어찼다.
아르무크 계곡의 철교를 성공적으로 폭파시킨 다음날, 당나귀를 타고 캠프에 불쑥 나타난 키 크고 가무잡잡한 피부와 준수한 용모, 칼같이 단정한 수트 차림의 남자가 록온에게 내민 명함에는 그렇게 박혀 있었다.
록온은 명함을 한 번 보고, 싹싹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를 한 번 보고, 눈을 부비고 명함을 세 번 더 확인한 후 물었다.
"본명입니까?"
"본명입니다."
"가명이 아니라?"
"가명이 아니라."
선조와 부모가 똑같이 머레이 장군의 센스를 지녔던 모양이었다. 록온은 합장을 했다. 속으로만.
"근데 시카고 트리뷴이라면……미국이잖아요? 세상에, 고작 영국 장교 하날 취재하러 미국에서 여기까지 왔단 말입니까?"
"모르시는 말씀을. 이만한 대어도 드뭅니다. 터키의 압제에 대항하여 떨쳐 일어난 아랍혁명군. 아랍의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가장 용맹한 전사들의 부족인 하리스와 호웨이타트의 연합을 주도하고 반 년이 넘게 게릴라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존경과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갈색 머리와 녹색 눈의 미청년 장교. 완벽하죠. 뇌주름이 하나인 미국인들이 넋을 놓고 열광할 소재잖습니까."
"어이 당신도 미국인."
록온은 이마에 드리워진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빙빙 꼬면서 한숨을 쉬었다.
"이보세요, 난 미국 친구들이 쌍수 들고 환영할 만한 슈퍼 히어로도 아니고요, 언론플레이엔 흥미도 없고, 하물며 민간인을 동행시키기엔 이 임무는 너무 위험합니다. 미안하지만 돌아가 주,"
"영국군에게서 동행 취재 허가는 받았습니다."
"이봐 사령부!"
"에이커 경은 매우 재미있는 분이더군요. '나의 귀하고 귀한 공주의 아름다움을 세상 만방에 알리는 일이라면 환영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 있겠나!' 라며 흔쾌히 사인을 해주셨습니다."
록온이 그레이엄을 3층이 아니라 30층에서 던져버리지 않은 것을 진심으로 회한하는 사이, 요한 트리니티는 매우 연극적인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덧붙였다.
"사실 특종도 특종이지만,"
"응?"
"무엇보다 난 당신에게 흥미가 있습니다, 록온 스트라토스. ──아니, 닐 로렌스 디란디라 해야 하나요?"
"……! 내 이름을 어떻게……!"
"에이커 경을 통해 자료를 열람했으니까."
"죽인다 이 자식."
"사진보다 실물이 더 미인이라서 기쁘군요. 여기까지 고생스럽게 온 보람이 있었습니다."
"저기, 참으로 열렬한 관심을 보여줘서 저어어어엉말 고마운데 말이죠……!"
록온은 요한의 상완이두근을 사냥개가 여우의 목에 악착같이 이빨을 박듯 다섯 손가락이 다 파고들도록 꾸와아아아아아악 움켜쥐었다.
"──만난 지 20분도 안된 남정네의 엉덩이를 찰지게 주물러대는 이 손은 뭘까나?!"
"이거 실례. 품이 넉넉한 아랍의상으로도 숨겨지지 않는 매혹적인 곡선이기에."
"아니 옷은 왜 벗겨!?"
"사진의 기본은 누드사진이잖습니까."
"꺄아아악 겨……경찰 아저씨! 변태! 변태가! 변태가 여기 있어요오오오오!"
"그리고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왜 그놈의 수트는 핑크색인 거냣!!"
다행히도 때맞춰 군막에 들어온 세츠나가 요한을 구축(驅逐)하고 반쯤 벗겨진 채 깔려 있던 록온을 구해내긴 했지만, 그 대가로 록온은 무릎을 꿇고 정좌한 채 여덟 살이나 어린 아이에게 엄마가 묘령의 처녀에게 늘어놓을 것 같은 설교를 주구장창 들어야만 했다.
남자는 다 짐승이다, 록온 스트라토스.
나흘 후의 제말 파샤의 기차 습격 작전도 무사히 종료하였다.
호웨이타트는 뒤집어엎은 기차의 화물은 물론 준마 이백 필까지 얻고 입이 찢어졌으나 (특히 할렐루야는 기차에서 퉁겨나온 트렁크 밑바닥에 용케도 박살나지 않고 남아 있었던 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을 연주하는 화사한 오르골이 마음에 쏙 든 듯 하루종일 붙어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록온은 그놈의 오지랖이 뭔지 아드레날린 과다 분비로 눈이 벌개진 사내들의 열광에 응한답시고 쓸데없이 기차 지붕에 올라가 승리의 춤을 추는 뻘짓을 하다 팔에 총만 맞았다.
오늘 하루도 손해 보는 역할은 건재했다.
"아야야야야야야야! 세츠나! 아파! 세츠나!!!"
"참아라. 그러고도 남자인가."
세츠나는 무덤덤한 얼굴로 그나마 생채기만 나고 큰 부상은 면한 록온의 팔에 요오드팅크를 좍좍 뿌리고 무자비하게 붕대를 졸라댔다. 세상의 악의가 느껴진다며 체면을 불구하고 징징대는 딱한 어른은 깔끔히 씹고 약상자를 갈무리하는 아이의 옆모습을, 록온은 담요 위에서 뒹굴거리며 바라보다 문득 한 가지를 깨달았다.
"얼레. 세츠나, 키 좀 자랐다?"
"그런가. 재어볼 시간이 없었다."
"안 재어봐도 틀림없어요. 이 형아의 눈썰미는 정확합니다. 적어도 1인치는 컸네."
세츠나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입가에는, <세츠나의 속을 귀신같이 캐치하기>로는 세계 챔피언도 능히 딸 수 있을 록온이나 겨우 알아볼 법한 만족스런 기색이 은은히 감돌았다.
우웃. 록온은 내심 누구한테 향한 건지도 모를 욕설을 짧게 퍼붓고, 늘 하듯이 옆에 붙어 앉은 아이를 답삭 끌어안았다가 매를 벌었다.
팔꿈치를 정통으로 때려박힌 명치를 부여잡고 요에 엎어진 채, 뺨과 이마는 여전히 앳된 곡선을 간직하고 있으되 서서히 청년의 강건한 선이 제법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세츠나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마스투라 우물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 그저 가녀리고 어리게만 보이던 게 엊그제 같은데.
불과 열 여섯에도 이토록 사나이다운 이 아이가 스무 살이 넘고 어른이 되면 어떤 모습이 될까. 눈을 감고 몽상해 보았다. 필경은, 누구나가, 깐깐하고 매서운 티에리아마저도, 반하지 않고는 못 배길 근사한 남자가 되리라.
즐거운 상상을 한동안 마음껏 누린 록온은 두연히, 자리 한 켠을 얌전히 차지하고 누운 새까만 표지의 8절판짜리 얄푸리한 책을 발견하고 눈을 둥글게 떴다. 겉면에는 멋진 은색의 장식체로 Democracy for Kids란 제목에 박혀 있었다. 위쪽으로 고개를 비죽 내민 파란색 책갈피는, 책 귀퉁이를 접지 않도록 록온이 준 것이다.
아, 이게 바로.
약상자를 정리하고 습관처럼 록온에게 붙어 앉는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요즘 공부, 열심히 한다며."
"……."
세츠나는 실쭉하게 고개를 돌려버렸고, 그 몸짓에서 쉽사리 쑥스러움을 읽어낸 록온은 애써 웃음을 깨물었다. 여기서 웃고 말면 아이는 보나마나 제대로 앵돌아질 테고, 그래서 한동안 말도 못 붙이고 눈치만 보게 되는 것은 록온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어때, 민주주의는 재미있어?"
"……그럭저럭."
"혹, 새로운 장래희망은 정치가라던가?"
"아랍인의 국가가 생기면 그때 알려주마."
"우오 대답은 하되 내용은 없는 전형적인 정치가 발언! 세츠나 군 나름 소질 있지 말입니다!"
록온은 거대한 돔에 모인 각 부족의 면면들을, 의제를 진지하게 토론하는 아랍의회를, 그리고 높직한 연단에 올라 근엄하게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는 세츠나를 마음속으로 그려보았다. 웃음이 새어나왔다.
현실이 될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현재의 아랍에는 시기상조일지도 모르고, 격심한 반대에 부딪혀 좌초할지도 모르고, 심지어는 끝끝내 아랍인의 국가를 보지 못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아이는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나을지도 모르는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전부 헛수고가 될 수도 있음을 이해하고 그걸 감수한 채, 먼저 스스로가 변하고자 묵묵히 노력하고 있다. 벌써부터 손때가 묻고 책장이 너덜거릴 만큼 책을 읽고 읽고 또 읽어가면서.
아아, 사랑스럽지 않은가.
록온은 거의 충동적으로 말했다.
"세츠나는 분명히 좋은 남자가 될 거야. 내가 보증할게."
손을 뻗어, 커다란 적갈색 눈동자를 더욱 크게 뜬 아이의 뺨을 쓸어주었다.
"빨리 커라, 우리 꼬맹이."
세츠나는 록온을 걷어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