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사막에서는 물 한 방울도 귀중한 보고
Chapter 2.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는 뻘소리는 작작하고 그냥 건너라
Chapter 3. 무모함이 도를 넘으면 귀신도 질린대더라
Chapter 4. 남자의 헌팅 대사는 예나 지금이나 발전이 없다
Chapter 5. 바보와 가위는 쓰기 나름
Chapter 6. 잠자는 공주는 원래 변태성욕자의 이야기라죠
Chapter 7. 애들은 모르는 사이에 알아서 자란다
Chapter 8. 참을성도 삼세 번까지
Chapter 9. 나쁜 일은 언제나 한꺼번에 터진다
Chapter 10.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데 정말이긴 한 거냐
Epilogue. 그리고,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다
Chapter 6. 잠자는 공주는 원래 변태성욕자의 이야기라죠
결론부터 말하자면 알렐루야를 데려와서 정답이었다. 유사에 빠진 낙타를 으라차차 기합 한 번에 통째로 뽑아내는 동행인이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낙타와 조랑말의 고저 차가 격심해 이야기 좀 할라치면 둘 다 목이 빠질 지경이었지만 뭐, 소소한 문제일 뿐이다.
"저 말이다 알렐루야."
"네?"
"대체 왜 조랑말이야? 낙타나 말이 훨씬 편할 텐데."
알렐루야는 수줍은 처녀처럼 그을린 뺨을 붉혔다.
"낙타는 무서워서……."
"……."
‡ ‡ ‡ ‡ ‡
대책없는 시나이 사막 크로스컨트리에는 꼭 엿새가 걸렸다.
최근 한 달 사이 골수까지 낙타덕이 되어 충실하고 선량한 뒤나메스를 교외에 홀로 남겨둘 생각만 해도 위가 뒤틀리고 덩달아 심장도 찢어진 록온은 순 깡으로 전투를 불사하고 카이로 시내 한복판의 영국 사령부 건물까지 낙타로 밀고 들어갔다.
어째선지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뒤나메스와 알렐루야의 퀴리오스를 나란히 철책에 묶어도 제지가 없었다. 슬몃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뒤나메스가 쉴 자리가 생겨서 나쁠 일은 없었으므로 찜찜함은 깔끔히 무시했다.
그날 낙타 한 마리와 조랑말 한 마리는 입이 닿는 범위 내의 정원수를 죄다 뜯어먹었다.
머레이가 있을 사령관실로 서둘러 향하며 장교 전용 카페테리아 앞을 지나치려다, 록온은 충동적으로 방향을 휙 틀어 계단을 훌쩍 뛰어올라갔다. 석회를 함유한 미끄덩거리는 물도 감지덕지해야 했던 사막 생활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쳤고 맛있기로 유명한 레모네이드가 간절히 그리웠으며 무엇보다 남이 죽도록 고생할 때 그간 시원한 사령부에서 맛있는 거 먹으며 노닥거렸을 놈들에 대한 조낸 원초적인 심술이 꿀렁꿀렁 치밀어올랐기 때문이었다. 유치하다고? 남자는 몇 살을 잡숴도 마음만은 소년이라니까요.
록온은 고개를 돌려 머뭇거리기만 하고 따라오지 않는 알렐루야를 재촉했다.
"알렐루야 뭐해? 얼른 오지 않고."
"에엣……그치만 록온, Officer Only라고 붙어 있는데요……!"
"신경 쓰지 마 신경 쓰지 마. 나한테 콱 맡겨."
아랍복장에다 쭈뼛거리면서도 어쨌든 착하게 말 잘 듣고 따라온 알렐루야까지 대동하고 있었으므로 그것이 무슨 클럽이든 클럽의 출입 자격은 광적으로 수호하는 영국인의 기질 상 틀림없이 격렬한 저항에 맞부딪칠 줄로 예상하고 신나게 싸울 준비를 마쳤건만, 보초는 가로막기는커녕 얼굴을 붉히며 허리를 숙였을 뿐이었다. 쉽사리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하고 살짝 맥이 빠진 록온은 가벼운 의혹에 사로잡혔다. 눈썰미 좋게 날 알아봤으면 경례를 붙여야 하지 않나?
여하튼 록온이 카페테리아의 문을 열고 쑥 들어가자 삼삼오오 모여 당구를 치거나 마실 거리를 손에 들고 시시한 환담에 열을 올리던 장교들은 일제히 침묵했고, 카페테리아 안에는 죽음 같은 정적이 감돌았다. 순발력이 그다지 좋지 못한 친구들이 <장교 전용>에 존재해서는 안 될 이방인의 난데없는 침입에 경악해 머리가 일시정지를 했나 보다 여겼지만, 10초가 지나고 20초가 지나고 냉동참치가 해동할 시간이 지나도 누구 하나 여기는 장교 전용이라 외치는 놈이 없었다. 다들 입을 헤벌리고 열심히 록온을 주시하기만 할 뿐이었다.
뭔가 이상했다.
어쨌든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곧장 카운터로 향한 록온은 두건은 젖히고 문답무용으로 크고 달고 시원한 레모네이드 두 잔을 주문했다. 나가달라 당장 아우성을 쳐야 할 바텐더 역시 이의를 제기하기는커녕 둥근 얼굴에 홍조를 띠우고 바지런히 이리저리 뛰더니 신속하고도 정중하게 두 잔을 만들어 바쳐왔다. 시키지도 않은 스트로까지 꽂아서.
뭔가 점점 더 이상했다.
레모네이드의 맛은 여전히 죽여줬지만, 록온은 가벼운 심술 겸사겸사 카페테리아를 먼저 찾은 걸 이미 가시방석에 앉은 심정으로 죽도록 후회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느 틈에 모여들었는진 몰라도 장교와 사병을 가리지 않고 벌떼처럼 문가에 달라붙어 이쪽을 열렬히 바라보는 저 무리는 대체 무어란 말인가.
그래도 기대하는 표정으로 양손을 모아잡고 수줍게 선 바텐더에게 잔잔히 미소를 지어주는 서비스는 빼먹지 않았지만(코를 싸쥐고 안쪽으로 황급히 달아나 버렸다. 어째서야), 프레셔에 약한 알렐루야에게 이르러선 이건 뭐 레모네이드를 코로 마시는지 입으로 마시는지 갈피를 못 잡고 식은땀을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쏟고 있었다. 슬슬 애 얼굴이 녹아내리는 건 아닌지 불안해지기 시작할 무렵 반가운 면상이 인간방벽 틈새로 불쑥 출현했다.
"닐! 야 이 자식 살아 있었구나!"
"랏세!"
지옥에서 부처님을 보는 게 아마 이런 느낌일까. 록온은 스툴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요령좋게 카페테리아 안까지 비집고 들어온 랏세를 반겼고, 그리고 다음 순간 쩌저적 얼어붙었다.
"웬 아라비아 공주님이 카페테리아에 나타났다고 쌩야단들이길래 존안이나 좀 배견하러 왔더니, 뭐야 너였냐. 으하하하하하."
"……."
록온은 손바닥으로 오른쪽 귀와 왼쪽 귀를 번갈아가며 팡팡 두드렸다. 끼인 모래를 마지막 한 톨까지 탈탈탈탈 털어내고, 다시 한 번 랏세를 보았다.
"미안, 내 귀가 좀 이상해졌나 봐. 카페테리아에 뭐가 나타나?"
"아라비아 공주님."
"……공주님이 어디 계셔?"
"어이어이, 왜 못 알아들은 척은 하고 그러냐. 너 말야 너."
"……예?"
"새하얀 옷을 입은 천사 같은 미인이 나타났단 소문이 지금 짜아하대도. 으하하하하하. 뭐가 니가 좀 미인이긴 하다만. 근데 당최 어서 난 옷이냐?"
아 이런, 록온은 탄식했다. 귓전에서 왱왱 울리는 모래폭풍과 꼬박 엿새를 격투했더니 그만 청력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공주라느니 천사라느니 미인이라느니 무언가 살떨리는 단어가 자꾸만 들려오는 걸 보면 이만저만 문제가 심각하지 않았다. 잊지 말고 꼭 의사에게 검사를 받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닐? 어이 닐 임마, 현실도피하지 마?"
랏세가 현실에서 전심전력으로 도주하고 있는 록온의 눈앞에서 손을 짤짤 흔들며 지상으로 도로 끌어내리려 애를 쓰는 사이, 구경꾼들 사이에는 닐 디란디 중위래, 라는 웅성거림이 삽시간에 퍼져나갔고, 문에 눌어붙어 소심하게 동정을 살피던 장교들은 둑이 터진 것처럼 일제히 카페테리아로 쏟아져 들어왔다. 록온과 알렐루야를 겹겹으로 둘러싸고 모두가 한꺼번에 입을 모아 제각기 다른 말을 떠들어대니 천장을 뒤흔드는 불협화음으로 고막이 떨어져나갈 지경이었다. 현실도피도 뜻대로 못하게 된 록온은 귀를 틀어막고 순서를 지키라고 고함을 질러대다 시선과 쪽수의 압박에서 우선 알렐루야부터 피신시켜야 한다는 걸 퍼뜩 깨달았으나,
"야 이 시발샛기들아 시끄러어어어어어어어어어!!"
한 발 늦었다.
록온은 하릴없이 뻗은 손을 거두고 잠자코 뒤로 돌아 방치해 둔 스트로를 도로 물었다. 레모네이드는 아직도 맛있었다.
‡ ‡ ‡ ‡ ‡
할렐루야가 집기를 대략 4할 정도 깨부수고 록온의 정줄이 허공을 오락가락 맴돌 무렵 드디어 구세주가 나타났다.
"젠장 록온 스트라토스, 어디 짱박혀 있다가 슬금슬금 나타난 거냐? 이건 다 무슨 소동이야?"
조슈아의 제비마냥 얄쌍한 면상이 이토록 반가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었다.
"브……브라이턴 중령님……!"
"헉 야 왜 울면서 안겨! 징그러 임마!"
그래도 억지로 뿌리치지는 않았다. 근본은 좋은 사람이다.
록온은 조슈아의 가슴팍에 엉겨붙어 속이 풀릴 때까지 실컷 울고 짠 다음, 티에리아의 캠프에서 헤어진 이후의 경위를 간단히 설명했다.
"맙소사, 아카바를?"
"예."
"정말이지?"
"농담 따먹기나 하려고 시나이를 건너왔겠어요."
"젠장, 그럼 직접 에이커랑 면담하는 게 좋겠다."
록온은 눈을 크게 떴다. 에이커라면.
"설마, 그레이엄 앨런비 에이커 경이?"
"그래, <그> 그레이엄 앨런비 에이커 말고 누구겠냐. 머레이 장군의 후임으로 부임했어."
"헤, 헤에……."
어째 꼭 그레이엄 F*CK 앨런비 SH*T 에이커로 들리는데 진짜 청력 검사를 받긴 받아야겠다고 재차 다짐하며, 록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 또, 저쪽은 사절 자격으로 온 호웨이타트 족장 알렐루야 아우다 아부 타이……인데, 들릴 것 같지가 않네요……."
한 손에 장교 하나씩 휘어잡고 광기 만땅으로 휘두르며 카페테리아를 개박살내는 할렐루야에게 접근할 배짱 따윈 진작에 없었으므로 록온은 깨끗이 단념하고 조슈아의 안내를 받아 바닥에 널브러진 장교들을 피해 자리를 떴다. 설마 건물을 다 부수기 전엔 알렐루야가 말려주겠지.
‡ ‡ ‡ ‡ ‡
우와아. 록온은 감탄했다.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역전의 용장 그레이엄 앨런비 에이커 중장은 화사한 허니 블론드와 선명한 에메랄드빛 눈동자의, 그야말로 동화 속에서 그대로 뽑아왔을 법한 왕자님 같은 풍모의 동안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틀림없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한 번이라도 안아보려 앞다투어 달려드는 천사처럼 사랑스러운 아이였으리라.
쓸데없이 위로만 쭉쭉 뻗은 보좌관 덕에 다소 작아보이는 게 옥의 티라면 티였으나 전신에서 자연스레 뿜어져나오는 여유로움과 당당함이 충분히 갈음하고 있었다. 유능하고 잘생기고 집안 빵빵하고 인망도 있고 심지어 성격도 모나지 않으니 전설로만 듣던 엄마친구아들 스펙이 바로 이런 거구나. 때로는 세상에 완벽한 남자가 존재하긴 하나 보다고 같은 XY 염색체로서 순수하게 경탄한, 것까진 좋았다만.
그런데 대체 이 장군은 무엇 땜에 코를 바짝 붙이고 날 들여다보고 있는 걸까 동생아.
왕따시만한 땀방울이 족히 열댓 개는 매달릴 시간을 들여가며 턱에 손을 대고 록온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낱낱이 관찰한 그레이엄은, 마침내 엄숙하게 말했다.
"아름답군."
"……예?"
"부드럽게 물결치는 갈색 고수머리, 푸른색과 녹색을 동시에 품은 신비로운 눈동자, 투명하게 비칠 듯 새하얀 피부! 완벽해!"
"……예에?"
"그야말로 잠자는 공주다!"
"예!!?"
"껴안고 싶구나, 공주!"
"히, 히에에에에에에엑!!!!"
아무래도 완벽한 남자가 세상에 존재할 가능성은, 단지 하나의 가능성으로만 영원히 봉인해야 할 모양이었다.
‡ ‡ ‡ ‡ ‡
그레이엄의 소꿉친구이고 학우이자 보좌관인 빌리 카타기리 대령은 새로 생긴 전문점에서 사온 따끈따끈한 도넛을 행복하게 씹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끝없이, 끝없이 펼쳐진 파아란 하늘.
"아아, 날씨 좋다……."
부하의 옷을 강제로 들추며 입술을 빼앗으려 시도하는 친우와 공포에 질린 나머지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쥐고 두들겨패는 중위의 난투극으로 방안은 아수라장이었지만 상식의 잣대로는 측정이 불가능한 그레이엄의 깊고 오묘한 정신세계야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일일이 신경쓰고 살면 소꿉친구 겸 학우 겸 보좌관 따위 애초에 못해먹고, 또한 요즘 세상에 직장 내 성희롱이야 흔해빠진 일이었으므로, 그는 도넛을 음미하는 쪽을 기꺼이 선택했다.
현명한 결정이었다.
‡ ‡ ‡ ‡ ‡
다행히 그레이엄은 아랍복장에는 그다지 조예가 깊지 않았기 때문에 공공의 면전에서 입은 게 홀랑 벗겨지는 수치플레이만은 면했다. 반은 찢어졌지만.
침묵으로 신경질을 팍팍 부리는 세츠나가 눈앞에 선했다. 록온은 찢어진 옷자락을 추스르며 토라질 아이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잠시 깊고도 암울한 고뇌에 빠졌다.
용케도 책상 앞으로 돌아가 준 그레이엄의 머리 한켠에 박힌 문진 틈새로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고 있었지만, 인간의 뇌는 그런 꿈에 나올까 두려운 광경은 안 본 셈 치라고 정교하고도 우수한 것이다.
"몸가짐도 정숙하군, 공주! 아주 훌륭해!"
"누가 공주야!!"
상관에 대한 예의고 지랄이고 다 망각한 록온이 크르렁대거나 말거나, 그레이엄은 카타기리가 건네준 자료철을 받아들고 두르르륵 넘겨보기 시작했다. 카타기리는 덤으로 깊은 배려심을 발휘하여 정수리에 박힌 문진도 조용히 뽑아주었다.
"록온 스트라토스. 본명 닐 로렌스 디란디. 계급 중위. 24세. 북아일랜드 출신인가. 신장 6피트 2인치. 체중 156파운드. 3월 3일생. 물고기자리 O형. 좋아하는 색은 녹색. 취미는 독서와 자동차. 좋아하는 음식은 감자. ……유감이군. 쓰리사이즈가 없다니."
"있을 것 같냐! 그리고 뭐야 그건! 캐릭터 프로필이냐!"
"가족구성은……호오, 역시 카이로에서 복무 중인 동생이 있나. 어디. 닥터 라일 로,"
"──예, 예에예예예옛! 자 뭐가 더 궁금하시죠 장군님! 뭐든지 다 물어주십시오 저한테! 어서 저한테!"
그레이엄은 자료철을 내려놓고 깍지 낀 손으로 턱을 받치며 싱긋이 웃었다.
"영국군 최고의 스나이퍼. 상층부가 골머리를 썩이는 말썽꾸러기. 어겨보지 않은 규율이 없고 한 번 정하면 남의 말은 결코 듣지 않지. 한편으로는 타인의 곤궁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자상하고 친절하고 붙임성도 좋아서 인망은 높아. 여러 언어에 능통하고 아랍 사정에도 정통해. 아, 자네는 의심할 여지없이 흥미로운 존재야. 그래, 누가 아카바를 점령하라 시키던가?"
"아무도요. 제가 판단했습니다."
"어째서지?"
"터키군이 수에즈 운하로 가려면 아카바를 통해야 하니까요."
"더는 아니야. 요즘은 베세다에서 온다네."
"압니다. 하지만 우린 가자까지 진출했죠."
"호오?"
"그러면 아카바는 영국군의 오른쪽 뒤에 남습니다."
"음."
"예루살렘으로 진출해도 마찬가지고요."
"내가 예루살렘을 넘보고 있나?"
"아닙니까?"
"좋아, 내가 졌네."
"그대로라면 엘 헤리쉬와 가자를 위협할 요소가 됩니다."
"그밖에는?"
"제일 중요합니다. 아카바는 메디나와 이어져요."
"메디나."
"예, 모든 아랍인의 정신적인 요람이죠."
"흐음."
그레이엄은 짤막하게 찬탄했다.
"아름답고, 현명하고, 날카롭고, 이지적이야. 알면 알수록 더욱 더 사랑스럽군, 공주!"
"공주는 빼!"
"중위의 판단은 결과적으로는 옳았어. 하지만 자네가 명령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행동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네. 분명인간이라면 누구나 직감과 본능에 기대어 행동해야 할 때가 있지만, 군인에게는 위험부담이 너무나 크지. 따라서."
그레이엄은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났다.
"닐 로렌스 디란디 중위, 자넬 소령으로 진급시키겠네."
"……무슨 저주입니까 그건7)……?"
"필요한 사항은 문서로 작성해 여기 있는 카타기리 대령에게 제출하도록. 가능한 한 지원은 아끼지 않겠어. 자, 돌아가서 자네의 임무를 마치게."
"게다가 진행은 광속이고!?"
"나는 참을성이 약하고 진중함이 부족해."
"자기 입으로 말하지 마!"
"한 번 이거다 싶으면 꾸물거리는 건 질색일세. 더구나 자네는 뒤에 남기고 온 것들이 걱정되어 안절부절 못하고 있더군. 아름다운 얼굴이 가엾게도 수심으로 흐려져 있기에 조금 오지랖을 보였네만, 왜, 민폐였던가?"
"어……."
록온은 정곡을 찔려 내심 속이 뜨끔했다.
예리한 남자다. 이해력도 좋고, 융통성도 있으며, 막무가내에 방법은 좀 이상하지만 부하에게 마음을 쓸 줄도 안다. 정신체계는 지독하게 8.25차원적이고 얼굴 보고 불과 수 분만에 다짜고짜 사람의 입술을 덮치려 한 성추행범이지만, 마치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그레이엄 앨런비 에이커는, 상관으로서는 목숨을 걸고라도 따라볼 만한 사내일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조금은 존경심이 일었다.
책상을 돌아나온 그레이엄은 우아한 몸짓으로 록온의 장갑 낀 손을 잡았다.
"행운을 빌겠네. 록온 스트라토스 소령."
그리고는, 손가락 끝에 정중히 입을 맞추었다.
"나를 위해 정조는 소중히 간직하게나."
록온은 그레이엄을 창밖으로 집어던져 버렸다.
집어던지고 나서야 깨달았는데, 사령관실은 3층이었다.
낙타와 조랑말의 고저 차가 격심해 이야기 좀 할라치면 둘 다 목이 빠질 지경이었지만 뭐, 소소한 문제일 뿐이다.
"저 말이다 알렐루야."
"네?"
"대체 왜 조랑말이야? 낙타나 말이 훨씬 편할 텐데."
알렐루야는 수줍은 처녀처럼 그을린 뺨을 붉혔다.
"낙타는 무서워서……."
"……."
대책없는 시나이 사막 크로스컨트리에는 꼭 엿새가 걸렸다.
최근 한 달 사이 골수까지 낙타덕이 되어 충실하고 선량한 뒤나메스를 교외에 홀로 남겨둘 생각만 해도 위가 뒤틀리고 덩달아 심장도 찢어진 록온은 순 깡으로 전투를 불사하고 카이로 시내 한복판의 영국 사령부 건물까지 낙타로 밀고 들어갔다.
어째선지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뒤나메스와 알렐루야의 퀴리오스를 나란히 철책에 묶어도 제지가 없었다. 슬몃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뒤나메스가 쉴 자리가 생겨서 나쁠 일은 없었으므로 찜찜함은 깔끔히 무시했다.
그날 낙타 한 마리와 조랑말 한 마리는 입이 닿는 범위 내의 정원수를 죄다 뜯어먹었다.
머레이가 있을 사령관실로 서둘러 향하며 장교 전용 카페테리아 앞을 지나치려다, 록온은 충동적으로 방향을 휙 틀어 계단을 훌쩍 뛰어올라갔다. 석회를 함유한 미끄덩거리는 물도 감지덕지해야 했던 사막 생활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쳤고 맛있기로 유명한 레모네이드가 간절히 그리웠으며 무엇보다 남이 죽도록 고생할 때 그간 시원한 사령부에서 맛있는 거 먹으며 노닥거렸을 놈들에 대한 조낸 원초적인 심술이 꿀렁꿀렁 치밀어올랐기 때문이었다. 유치하다고? 남자는 몇 살을 잡숴도 마음만은 소년이라니까요.
록온은 고개를 돌려 머뭇거리기만 하고 따라오지 않는 알렐루야를 재촉했다.
"알렐루야 뭐해? 얼른 오지 않고."
"에엣……그치만 록온, Officer Only라고 붙어 있는데요……!"
"신경 쓰지 마 신경 쓰지 마. 나한테 콱 맡겨."
아랍복장에다 쭈뼛거리면서도 어쨌든 착하게 말 잘 듣고 따라온 알렐루야까지 대동하고 있었으므로 그것이 무슨 클럽이든 클럽의 출입 자격은 광적으로 수호하는 영국인의 기질 상 틀림없이 격렬한 저항에 맞부딪칠 줄로 예상하고 신나게 싸울 준비를 마쳤건만, 보초는 가로막기는커녕 얼굴을 붉히며 허리를 숙였을 뿐이었다. 쉽사리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하고 살짝 맥이 빠진 록온은 가벼운 의혹에 사로잡혔다. 눈썰미 좋게 날 알아봤으면 경례를 붙여야 하지 않나?
여하튼 록온이 카페테리아의 문을 열고 쑥 들어가자 삼삼오오 모여 당구를 치거나 마실 거리를 손에 들고 시시한 환담에 열을 올리던 장교들은 일제히 침묵했고, 카페테리아 안에는 죽음 같은 정적이 감돌았다. 순발력이 그다지 좋지 못한 친구들이 <장교 전용>에 존재해서는 안 될 이방인의 난데없는 침입에 경악해 머리가 일시정지를 했나 보다 여겼지만, 10초가 지나고 20초가 지나고 냉동참치가 해동할 시간이 지나도 누구 하나 여기는 장교 전용이라 외치는 놈이 없었다. 다들 입을 헤벌리고 열심히 록온을 주시하기만 할 뿐이었다.
뭔가 이상했다.
어쨌든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곧장 카운터로 향한 록온은 두건은 젖히고 문답무용으로 크고 달고 시원한 레모네이드 두 잔을 주문했다. 나가달라 당장 아우성을 쳐야 할 바텐더 역시 이의를 제기하기는커녕 둥근 얼굴에 홍조를 띠우고 바지런히 이리저리 뛰더니 신속하고도 정중하게 두 잔을 만들어 바쳐왔다. 시키지도 않은 스트로까지 꽂아서.
뭔가 점점 더 이상했다.
레모네이드의 맛은 여전히 죽여줬지만, 록온은 가벼운 심술 겸사겸사 카페테리아를 먼저 찾은 걸 이미 가시방석에 앉은 심정으로 죽도록 후회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느 틈에 모여들었는진 몰라도 장교와 사병을 가리지 않고 벌떼처럼 문가에 달라붙어 이쪽을 열렬히 바라보는 저 무리는 대체 무어란 말인가.
그래도 기대하는 표정으로 양손을 모아잡고 수줍게 선 바텐더에게 잔잔히 미소를 지어주는 서비스는 빼먹지 않았지만(코를 싸쥐고 안쪽으로 황급히 달아나 버렸다. 어째서야), 프레셔에 약한 알렐루야에게 이르러선 이건 뭐 레모네이드를 코로 마시는지 입으로 마시는지 갈피를 못 잡고 식은땀을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쏟고 있었다. 슬슬 애 얼굴이 녹아내리는 건 아닌지 불안해지기 시작할 무렵 반가운 면상이 인간방벽 틈새로 불쑥 출현했다.
"닐! 야 이 자식 살아 있었구나!"
"랏세!"
지옥에서 부처님을 보는 게 아마 이런 느낌일까. 록온은 스툴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요령좋게 카페테리아 안까지 비집고 들어온 랏세를 반겼고, 그리고 다음 순간 쩌저적 얼어붙었다.
"웬 아라비아 공주님이 카페테리아에 나타났다고 쌩야단들이길래 존안이나 좀 배견하러 왔더니, 뭐야 너였냐. 으하하하하하."
"……."
록온은 손바닥으로 오른쪽 귀와 왼쪽 귀를 번갈아가며 팡팡 두드렸다. 끼인 모래를 마지막 한 톨까지 탈탈탈탈 털어내고, 다시 한 번 랏세를 보았다.
"미안, 내 귀가 좀 이상해졌나 봐. 카페테리아에 뭐가 나타나?"
"아라비아 공주님."
"……공주님이 어디 계셔?"
"어이어이, 왜 못 알아들은 척은 하고 그러냐. 너 말야 너."
"……예?"
"새하얀 옷을 입은 천사 같은 미인이 나타났단 소문이 지금 짜아하대도. 으하하하하하. 뭐가 니가 좀 미인이긴 하다만. 근데 당최 어서 난 옷이냐?"
아 이런, 록온은 탄식했다. 귓전에서 왱왱 울리는 모래폭풍과 꼬박 엿새를 격투했더니 그만 청력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공주라느니 천사라느니 미인이라느니 무언가 살떨리는 단어가 자꾸만 들려오는 걸 보면 이만저만 문제가 심각하지 않았다. 잊지 말고 꼭 의사에게 검사를 받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닐? 어이 닐 임마, 현실도피하지 마?"
랏세가 현실에서 전심전력으로 도주하고 있는 록온의 눈앞에서 손을 짤짤 흔들며 지상으로 도로 끌어내리려 애를 쓰는 사이, 구경꾼들 사이에는 닐 디란디 중위래, 라는 웅성거림이 삽시간에 퍼져나갔고, 문에 눌어붙어 소심하게 동정을 살피던 장교들은 둑이 터진 것처럼 일제히 카페테리아로 쏟아져 들어왔다. 록온과 알렐루야를 겹겹으로 둘러싸고 모두가 한꺼번에 입을 모아 제각기 다른 말을 떠들어대니 천장을 뒤흔드는 불협화음으로 고막이 떨어져나갈 지경이었다. 현실도피도 뜻대로 못하게 된 록온은 귀를 틀어막고 순서를 지키라고 고함을 질러대다 시선과 쪽수의 압박에서 우선 알렐루야부터 피신시켜야 한다는 걸 퍼뜩 깨달았으나,
"야 이 시발샛기들아 시끄러어어어어어어어어어!!"
한 발 늦었다.
록온은 하릴없이 뻗은 손을 거두고 잠자코 뒤로 돌아 방치해 둔 스트로를 도로 물었다. 레모네이드는 아직도 맛있었다.
할렐루야가 집기를 대략 4할 정도 깨부수고 록온의 정줄이 허공을 오락가락 맴돌 무렵 드디어 구세주가 나타났다.
"젠장 록온 스트라토스, 어디 짱박혀 있다가 슬금슬금 나타난 거냐? 이건 다 무슨 소동이야?"
조슈아의 제비마냥 얄쌍한 면상이 이토록 반가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었다.
"브……브라이턴 중령님……!"
"헉 야 왜 울면서 안겨! 징그러 임마!"
그래도 억지로 뿌리치지는 않았다. 근본은 좋은 사람이다.
록온은 조슈아의 가슴팍에 엉겨붙어 속이 풀릴 때까지 실컷 울고 짠 다음, 티에리아의 캠프에서 헤어진 이후의 경위를 간단히 설명했다.
"맙소사, 아카바를?"
"예."
"정말이지?"
"농담 따먹기나 하려고 시나이를 건너왔겠어요."
"젠장, 그럼 직접 에이커랑 면담하는 게 좋겠다."
록온은 눈을 크게 떴다. 에이커라면.
"설마, 그레이엄 앨런비 에이커 경이?"
"그래, <그> 그레이엄 앨런비 에이커 말고 누구겠냐. 머레이 장군의 후임으로 부임했어."
"헤, 헤에……."
어째 꼭 그레이엄 F*CK 앨런비 SH*T 에이커로 들리는데 진짜 청력 검사를 받긴 받아야겠다고 재차 다짐하며, 록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 또, 저쪽은 사절 자격으로 온 호웨이타트 족장 알렐루야 아우다 아부 타이……인데, 들릴 것 같지가 않네요……."
한 손에 장교 하나씩 휘어잡고 광기 만땅으로 휘두르며 카페테리아를 개박살내는 할렐루야에게 접근할 배짱 따윈 진작에 없었으므로 록온은 깨끗이 단념하고 조슈아의 안내를 받아 바닥에 널브러진 장교들을 피해 자리를 떴다. 설마 건물을 다 부수기 전엔 알렐루야가 말려주겠지.
우와아. 록온은 감탄했다.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역전의 용장 그레이엄 앨런비 에이커 중장은 화사한 허니 블론드와 선명한 에메랄드빛 눈동자의, 그야말로 동화 속에서 그대로 뽑아왔을 법한 왕자님 같은 풍모의 동안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틀림없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한 번이라도 안아보려 앞다투어 달려드는 천사처럼 사랑스러운 아이였으리라.
쓸데없이 위로만 쭉쭉 뻗은 보좌관 덕에 다소 작아보이는 게 옥의 티라면 티였으나 전신에서 자연스레 뿜어져나오는 여유로움과 당당함이 충분히 갈음하고 있었다. 유능하고 잘생기고 집안 빵빵하고 인망도 있고 심지어 성격도 모나지 않으니 전설로만 듣던 엄마친구아들 스펙이 바로 이런 거구나. 때로는 세상에 완벽한 남자가 존재하긴 하나 보다고 같은 XY 염색체로서 순수하게 경탄한, 것까진 좋았다만.
그런데 대체 이 장군은 무엇 땜에 코를 바짝 붙이고 날 들여다보고 있는 걸까 동생아.
왕따시만한 땀방울이 족히 열댓 개는 매달릴 시간을 들여가며 턱에 손을 대고 록온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낱낱이 관찰한 그레이엄은, 마침내 엄숙하게 말했다.
"아름답군."
"……예?"
"부드럽게 물결치는 갈색 고수머리, 푸른색과 녹색을 동시에 품은 신비로운 눈동자, 투명하게 비칠 듯 새하얀 피부! 완벽해!"
"……예에?"
"그야말로 잠자는 공주다!"
"예!!?"
"껴안고 싶구나, 공주!"
"히, 히에에에에에에엑!!!!"
아무래도 완벽한 남자가 세상에 존재할 가능성은, 단지 하나의 가능성으로만 영원히 봉인해야 할 모양이었다.
그레이엄의 소꿉친구이고 학우이자 보좌관인 빌리 카타기리 대령은 새로 생긴 전문점에서 사온 따끈따끈한 도넛을 행복하게 씹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끝없이, 끝없이 펼쳐진 파아란 하늘.
"아아, 날씨 좋다……."
부하의 옷을 강제로 들추며 입술을 빼앗으려 시도하는 친우와 공포에 질린 나머지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쥐고 두들겨패는 중위의 난투극으로 방안은 아수라장이었지만 상식의 잣대로는 측정이 불가능한 그레이엄의 깊고 오묘한 정신세계야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일일이 신경쓰고 살면 소꿉친구 겸 학우 겸 보좌관 따위 애초에 못해먹고, 또한 요즘 세상에 직장 내 성희롱이야 흔해빠진 일이었으므로, 그는 도넛을 음미하는 쪽을 기꺼이 선택했다.
현명한 결정이었다.
다행히 그레이엄은 아랍복장에는 그다지 조예가 깊지 않았기 때문에 공공의 면전에서 입은 게 홀랑 벗겨지는 수치플레이만은 면했다. 반은 찢어졌지만.
침묵으로 신경질을 팍팍 부리는 세츠나가 눈앞에 선했다. 록온은 찢어진 옷자락을 추스르며 토라질 아이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잠시 깊고도 암울한 고뇌에 빠졌다.
용케도 책상 앞으로 돌아가 준 그레이엄의 머리 한켠에 박힌 문진 틈새로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고 있었지만, 인간의 뇌는 그런 꿈에 나올까 두려운 광경은 안 본 셈 치라고 정교하고도 우수한 것이다.
"몸가짐도 정숙하군, 공주! 아주 훌륭해!"
"누가 공주야!!"
상관에 대한 예의고 지랄이고 다 망각한 록온이 크르렁대거나 말거나, 그레이엄은 카타기리가 건네준 자료철을 받아들고 두르르륵 넘겨보기 시작했다. 카타기리는 덤으로 깊은 배려심을 발휘하여 정수리에 박힌 문진도 조용히 뽑아주었다.
"록온 스트라토스. 본명 닐 로렌스 디란디. 계급 중위. 24세. 북아일랜드 출신인가. 신장 6피트 2인치. 체중 156파운드. 3월 3일생. 물고기자리 O형. 좋아하는 색은 녹색. 취미는 독서와 자동차. 좋아하는 음식은 감자. ……유감이군. 쓰리사이즈가 없다니."
"있을 것 같냐! 그리고 뭐야 그건! 캐릭터 프로필이냐!"
"가족구성은……호오, 역시 카이로에서 복무 중인 동생이 있나. 어디. 닥터 라일 로,"
"──예, 예에예예예옛! 자 뭐가 더 궁금하시죠 장군님! 뭐든지 다 물어주십시오 저한테! 어서 저한테!"
그레이엄은 자료철을 내려놓고 깍지 낀 손으로 턱을 받치며 싱긋이 웃었다.
"영국군 최고의 스나이퍼. 상층부가 골머리를 썩이는 말썽꾸러기. 어겨보지 않은 규율이 없고 한 번 정하면 남의 말은 결코 듣지 않지. 한편으로는 타인의 곤궁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자상하고 친절하고 붙임성도 좋아서 인망은 높아. 여러 언어에 능통하고 아랍 사정에도 정통해. 아, 자네는 의심할 여지없이 흥미로운 존재야. 그래, 누가 아카바를 점령하라 시키던가?"
"아무도요. 제가 판단했습니다."
"어째서지?"
"터키군이 수에즈 운하로 가려면 아카바를 통해야 하니까요."
"더는 아니야. 요즘은 베세다에서 온다네."
"압니다. 하지만 우린 가자까지 진출했죠."
"호오?"
"그러면 아카바는 영국군의 오른쪽 뒤에 남습니다."
"음."
"예루살렘으로 진출해도 마찬가지고요."
"내가 예루살렘을 넘보고 있나?"
"아닙니까?"
"좋아, 내가 졌네."
"그대로라면 엘 헤리쉬와 가자를 위협할 요소가 됩니다."
"그밖에는?"
"제일 중요합니다. 아카바는 메디나와 이어져요."
"메디나."
"예, 모든 아랍인의 정신적인 요람이죠."
"흐음."
그레이엄은 짤막하게 찬탄했다.
"아름답고, 현명하고, 날카롭고, 이지적이야. 알면 알수록 더욱 더 사랑스럽군, 공주!"
"공주는 빼!"
"중위의 판단은 결과적으로는 옳았어. 하지만 자네가 명령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행동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네. 분명인간이라면 누구나 직감과 본능에 기대어 행동해야 할 때가 있지만, 군인에게는 위험부담이 너무나 크지. 따라서."
그레이엄은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났다.
"닐 로렌스 디란디 중위, 자넬 소령으로 진급시키겠네."
"……무슨 저주입니까 그건7)……?"
"필요한 사항은 문서로 작성해 여기 있는 카타기리 대령에게 제출하도록. 가능한 한 지원은 아끼지 않겠어. 자, 돌아가서 자네의 임무를 마치게."
"게다가 진행은 광속이고!?"
"나는 참을성이 약하고 진중함이 부족해."
"자기 입으로 말하지 마!"
"한 번 이거다 싶으면 꾸물거리는 건 질색일세. 더구나 자네는 뒤에 남기고 온 것들이 걱정되어 안절부절 못하고 있더군. 아름다운 얼굴이 가엾게도 수심으로 흐려져 있기에 조금 오지랖을 보였네만, 왜, 민폐였던가?"
"어……."
록온은 정곡을 찔려 내심 속이 뜨끔했다.
예리한 남자다. 이해력도 좋고, 융통성도 있으며, 막무가내에 방법은 좀 이상하지만 부하에게 마음을 쓸 줄도 안다. 정신체계는 지독하게 8.25차원적이고 얼굴 보고 불과 수 분만에 다짜고짜 사람의 입술을 덮치려 한 성추행범이지만, 마치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그레이엄 앨런비 에이커는, 상관으로서는 목숨을 걸고라도 따라볼 만한 사내일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조금은 존경심이 일었다.
책상을 돌아나온 그레이엄은 우아한 몸짓으로 록온의 장갑 낀 손을 잡았다.
"행운을 빌겠네. 록온 스트라토스 소령."
그리고는, 손가락 끝에 정중히 입을 맞추었다.
"나를 위해 정조는 소중히 간직하게나."
록온은 그레이엄을 창밖으로 집어던져 버렸다.
집어던지고 나서야 깨달았는데, 사령관실은 3층이었다.
7보통 2계급 특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