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사막에서는 물 한 방울도 귀중한 보고
Chapter 2.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는 뻘소리는 작작하고 그냥 건너라
Chapter 3. 무모함이 도를 넘으면 귀신도 질린대더라
Chapter 4. 남자의 헌팅 대사는 예나 지금이나 발전이 없다
Chapter 5. 바보와 가위는 쓰기 나름
Chapter 6. 잠자는 공주는 원래 변태성욕자의 이야기라죠
Chapter 7. 애들은 모르는 사이에 알아서 자란다
Chapter 8. 참을성도 삼세 번까지
Chapter 9. 나쁜 일은 언제나 한꺼번에 터진다
Chapter 10.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데 정말이긴 한 거냐
Epilogue. 그리고,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다
Chapter 8. 참을성도 삼세 번까지
아라비아 반도에서 맞은 첫 번째 겨울은 유난히 춥고 매서웠다. 호웨이타트는 매년 그렇듯이 동면에 들어가기 위해 겨울 캠프지로 이동했다. ("동면!?")
알렐루야는 록온의 양손을 부여잡고 봄이 되면 꼭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고, 그러고도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지 자꾸만 아쉽게 뒤를 돌아보며 멀어져갔다.
"아니 그러니까, 대체 웬 동면이냐고!!"
"낸들 알겠나."
‡ ‡ ‡ ‡ ‡
아랍혁명군에 합류하기 위해 달려오던 셰이크 탈랄 엘 하레이딘과 압둘라 아부 두메이크가, 철도의 정찰을 겸해 데라를 경유하다 터키군에게 체포되었다는 급보가 날아들었다.
작전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조용히!"
세츠나의 불호령 같은 일갈로 일단 소란은 가라앉았지만, 누구보다 충격을 받은 사람도 다름 아닌 세츠나였다. 셰리프 나시르는 창백한 얼굴을 들어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고 있는 소년을 보았다.
"셰리프 세츠나. 데라의 현 태수는, 분명 그 자였지요."
"알리 알 사셰스……!"
세츠나는 악다문 잇새로 마치 독을 토해내듯 증오를 알알이 박아 그 이름을 씹어뱉었다.
록온도 익히 아는 이름이었다. 아이가 여덟 살 때 부족을 뛰쳐나와 가담했던 도적단의 괴수였고, 지금은 터키군 장교가 되어 있는 악명 높은 무법자. 지휘관으로서는 분명 일급이지만 사상도 신념도 없으며 오로지 돈과 피와 저의 쾌락만을 갈구하는 인간 백정.
혹독한 고문을 겪고 마침내는 잔인하게 처형될 두 사람의 운명을 상기하고 좌중은 전율했다. 타파스의 족장이자 아랍 전역에 이름을 떨치는 탈랄 엘 하레이딘이 잡힌 이상 호웨이타트가 이탈하여 손 하나가 아쉬운 이 상황에 타파스 부족의 협력을 기대할 수 없게 된 것도 뼈아팠지만, 무엇보다 두메이크는 영국군 최고의 폭약 기술자 혼비의 수제자로, 얼마 전 심장병으로 쓰러져 최전선에서 물러난 뉴컴 중령의 빈자리를 메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앞으로의 작전에 얼마만한 차질이 발생할지는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무하마드 엘 데일란이 데라를 기습해 두 사람을 구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좌중은 삽시간에 두 패거리로 갈라져 격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어느 쪽도 결론을 내지 못하고 단지 치열하게 갑론을박을 벌이는 동안, 저격수의 냉정한 사고로 이것저것 방안을 저울질해 본 록온은 셰리프 나시르에게 생뚱맞은 질문을 던졌다.
"셰리프 나시로, 탈랄 엘 하레이딘과 두메이크의 현상금을 합치면 얼마였죠?"
뜬금없기 짝이 없는 질문에 노인은 잠시 어안이벙벙해 하였으나, 곧 대강의 액수를 헤아려주었다.
"아마 100기니쯤 될 거요."
"100기니인가. 나보다는 적네요."
세츠나가 퉁기듯이 머리를 들었다.
"설마, 록온……!"
록온은 조용히 선언했다.
"내가 가겠습니다."
싸늘한 정적이 사방을 뒤덮었다.
"기습하기에는 데라의 규모가 너무 커요. 알리 알 사셰스에 대해서라면 나도 여러 가지로 주워들었으니, 어떤 부류의 인간인지 대충은 압니다. 교환 조건으로 협상해 볼게요. ──나야 영국인이니까, 뭐 그 친구들한테 제네바 협정을 기대할 순 없겠지만, 죽이지는 않을 거예요."
돌았느냐는 누군가의 외침을 신호로 짧은 정적은 산산조각이 났다. 입 가진 자들은 하나같이 격렬한 반대와 비난을 퍼부었고, 셰리프 나시르는 절망적으로 머리를 감싸쥐었으며, 그리고 세츠나는 미친 듯이 분통을 터뜨렸다. 말이 되는 소리를 지껄여라. 네가 사셰스를 알긴 뭘 안다는 건가. 그놈에 비하면 네푸드와 시나이는 차라리 어린애 장난이다. 미쳐도 이렇게 미칠 순 없다. 그 자가 협상에 응할 줄 아느냐. 목이 추가로 하나 더 떨어지는 게 고작이다. 그렇게 죽고 싶어 환장했나, 록온 스트라토스!
급기야는 격정에 사로잡혀 발작적으로 손이 닿는 전부를 할퀴어대는 아이를 록온은 끝까지 꼭 껴안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야음을 틈타 몰래 캠프를 나왔다.
‡ ‡ ‡ ‡ ‡
"그래서, 곧장 나한테 오셨다."
"응."
타오르는 듯한 붉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알리 알 사셰스는 유쾌하게 웃었다.
"이야, 이거 오랜만에 제대로 미친 놈을 보는구먼? 내가 그 두 놈에 널 얹어서 터키에다 팔아넘길 거란 생각은 안 들디?"
"아 물론 생각했지. 하지만 말야."
록온은 한 박자 쉬고 단숨에 내뱉었다.
"아저씨는 터키에 대한 충성심 따윈 엿 바꿔먹을 만큼도 없어. 용병이면서 데라 태수의 자리까지 올라왔으면 뭐 출세도 할 만큼 했고 이미 주머니도 두둑해. 여전히 돈은 좋지만 자극적인 재미가 좀 더 고파."
"헤에?"
"나한텐 그렇게 보이던데?"
마주본 탁한 회록색 눈동자가 번들거리는 것을 확인하고, 록온은 최대로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마무리를 지었다.
"이래봬도 인물감정은 정평이 났거든."
사셰스는 걸터앉은 책상에서 훌쩍 뛰어내려 록온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앞섶이 단숨에 밑으로 좍 뜯겨나갔지만 록온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불빛 아래 하얗게 드러난 투명한 피부에 휘파람을 나지막이 불고, 사내는 거친 손바닥과는 대조적인, 기분 나쁠 만큼 부드럽고 소름끼치게 열의가 없는 손놀림으로 애무를 가해왔다.
"워어 살결이 비단결일세. 곱게 자란 공주님은 역시 뭐가 달라요."
"덩치 큰 사내자식한테 공주님은 무슨 공주님이야 아저씨……징그럽게스리."
록온은 가진 자제력을 총동원하여 본능적인 혐오감으로 굳으려는 몸을 필사적으로 제어했다. 지금 상대하고 있는 이 사내는 괴물이다. 최대한의 여유를 보여야 했다. 최소한 여유가 있는 척 가장이라도 해야 했다.
"하긴 그 따위 시시한 잔챙이들 갖곤 아무것도 못하긴 해. 에이 아저씨가 선심 썼다. 풀어주지 뭐."
"세상에 고맙기도 해라."
"대신 공주님도 선심 좀 써."
"……뭔데."
"공주님 말대로야. 아저씬 재미있는 게 너무너무 좋은데 요즘 아주 심심해 죽겠어요. 기왕 온 거 우리끼리도 내기 하나 하자구."
쇄골을 어루만지고, 목을 쓸고, 입술을 더듬으며 사셰스는 즐겁게 말했다.
"앞으로 스물 네 시간, 무슨 일이 있어도 애원을 하지 않으면 공주님도 보내주마. 어때?"
선택의 여지가 있을 리도 없었다. 록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다음 순간 양어깨를 무자비하게 잡아누르는 손아귀의 엄청난 힘에 흠칫할 겨를도 없이, 날카로운 송곳니로 목덜미를 물어뜯겼다.
"웃……!"
반사적으로 짧은 신음성을 토해낸 록온을, 사내는 강제로 일으켜 세워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에게 냅다 밀쳤다.
"정중히 예뻐해 드려."
사셰스는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부수지만 마."
‡ ‡ ‡ ‡ ‡
병사들에게 발로 걷어채이며 끌려간 곳은 모퉁이에 있는 방이었다. 나머지 병사들이 육중한 몸으로 록온을 마구 짓눌러가며 기다란 의자 위에 묶는 동안, 하나는 시르카시아의 채찍을 들고 들어왔다. 채찍은 유연한 검은 가죽으로 만든 끈으로, 은으로 도금한 손잡이는 엄지손가락 정도의 굵기였고, 끝은 펜촉보다 더욱 날카로웠다.
병사는 채찍을 윙윙 울리며 열 대를 맞으면 누구나 용서해 달라고 울며 빌게 되고, 스무 대를 맞으면 자진해서 무슨 짓이든 시켜달라 애원하게 된다고 조롱하고는, 곧 있는 입을 다해서 채찍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가시가 달린 채찍이 부딪힐 때마다 마치 빨갛게 달아오른 철사가 온 몸을 휘감는 것 같았지만, 록온은 이를 악물로 마음속으로 숫자를 헤아렸다. 채찍이 등에 닿을 때마다 단단하고 하얀 융기가 부풀어올라 진홍색으로 붉어지고, 자국이 교차되는 지점에는 빨간 핏방울이 맺혔다. 매질이 계속됨에 따라 등은 피로 흥건해졌다. 숫자가 마흔이 넘어갈 무렵에는 더는 여력이 남지 않아, 록온은 숫자를 세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단지 비명만은 지르지 않도록 혀를 깨물어가며 힘겹게, 거의 동물적으로 남은 매질을 버텨냈다.
병사들은 10분 간격으로 교대하며 채찍을 휘둘렀지만 결국 먼저 지친 것은 그들 쪽이었다. 비명 한 번 안 지르네. 이렇게 독한 새끼는 처음 본다. 야 힘빠진다. 관두고 그거나 하나.
뻗어온 여러 개를 팔이 록온을 의자에서 끌어내려 마룻바닥에 잡아눌렀다. 바닥에 닿은 등이 끔찍스럽게 아팠지만, 아니나다를까 하반신을 풀어헤치고 다리를 버리는 것에 그만 어처구니가 없어져 한순간은 통증마저 잊을 뻔했다. 취향도 고약하지. 대체 6피트짜리 시커먼 사내자식이 뭐가 좋다고. 록온은 작게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아버렸고, 몸이 두 쪽으로 쪼개질 듯한 지독한 고통이 연속으로 엄습해오는 것을 멍해진 머리로 묵묵히 견뎠다.
채찍의 끄트머리가 몸 속으로 우악스럽게 파고들어왔을 때는 순간적으로 눈앞이 하얗게 바래며 지난 생애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기도 했으나, 그래봤자 지난 2년 동안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과거를 하도 여러 번 봐서 지루한 대목에서는 졸 수도 있을 정도였다. 록온은 제 생각이 우스워져 피식피식 웃었고, 아마도 그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병사가 뾰족한 부츠로 오른쪽 옆구리를 세게 걷어찼다.
그 다음부터는 숨을 쉴 때마다 부러진 늑골이 날카롭게 폐를 찔러대는 것에 대부분의 신경이 쏠렸으므로, 오히려 고맙기까지 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이봐, 괜찮으셔 공주님?"
위를 보았다. 희한하게 궁상맞은 폼으로 쭈그리고 앉은 사셰스가 있었고, 병사들은 없었다. 아저씨 눈엔 이 꼴이 괜찮게 보이냐고 핀잔을 주고 싶었지만, 다치고 말라붙은 목에선 유감스럽게도 소리다운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사셰스는 웃고는, 물먹인 솜처럼 무겁게 멍청하게 마룻바닥 위에 널브러진 록온의 손목을 움켜쥐고 확 비틀어올렸다. 상반신이 맥없이 딸려올라가고, 어깨에서 우드득 소리가 나며 끔찍한 통증이 척추를 관통했다.
뼈가 빠졌겠다. 록온은 남의 일처럼 생각했다.
사셰스는 록온을 짐짝처럼 질질 끌고 가 침대에 내동댕이쳤다. 입맛을 다시면서 허리띠를 끄르고, 야수 같은 사내는 무감각한 하얀 귓불을 씹으며 다정스레 속삭였다.
"근성은 칭찬해 주겠지만, 진짜 파티는 이제부터야, 공주님."
문이 닫혔다.
‡ ‡ ‡ ‡ ‡
갈빗대 사이에 박힌 칼날이 서서히 옆으로 비틀리는 것은 죽도록 아팠지만, 귓속에 쑤셔박혀 끈적하게 들락날락하는 두툼한 혀도 만만찮게 견디기 힘들었다. 록온의 머릿속 가장 깊숙한 곳에 남은 냉정한 부분이 욕설을 퍼부었다.
젠장, 이 망할 놈의 변태. 한 번에 하나만 하란 말이다.
‡ ‡ ‡ ‡ ‡
──…… 온!
──록온!!
──록온 스트라토스!!!
낯익은 목소리가 낯선 이름을 절박하게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록온 스트라토스……그게 누구였더라. 아아, 그래. 나였지. <여기>선 그게 내 이름이었다.
천근 납처럼 무겁게 가라앉는 눈꺼풀을 순전한 의지의 힘으로, 가까스로 밀어올렸다.
희뿌연 영상이 어지럽게 흔들리다 마침내 제 윤곽을 찾았다. 고집 센 까만 머리카락. 커다란 적갈색 눈동자. 가무잡잡한 얼굴. 세츠나. 어리지만 굳센 아이.
왜 그래 세츠나. 무슨 일이야. 어째서 울 것 같은 표정이야. 그런 얼굴 하지 마. 안 해도 돼.
돌아왔잖아. 다 살아서 돌아왔잖아. 난 아무렇지도 않아. 양쪽 팔, 양쪽 다리, 손가락, 전부 다 붙어 있어. 어쩐지 오른쪽 눈이 잘 뜨이질 않지만 아마도 대수롭지는 않아. 괜찮아. 정말 괜찮으니까. 그러니까.
울지 마.
셰리프 나시르의 외침도 아련하게 들려왔다. 빌어먹을, 록온, 록온 스트라토스! 정신 똑바로 차려요! 셰리프는 당신이 죽은 줄 알았단 말입니다! 노인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생경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어, 듣는 이쪽마저 당황스러웠다. 얼른 위로해드리지 않으면. 노인을 놀라게 하면 안 되지. 응, 걱정 말아요. 일어날게요. 일어나야죠. 일어나야 하는데.
손끝 하나도 까닥할 수가 없었다.
세츠나가 무언가를 더 말했으나, 의미가 되지 않는 소리는 귓전을 맴돌기만 할 뿐이었다. 아이의 제 나이보다 낮고, 메마르고 건조한 목소리가 자제심을 잃고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는 것만을 알았다. 아이를 안심시키고 싶어 웃어 보이려 애썼지만, 제대로 웃었는지는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뺨 위로 흘러내리는 뜨겁고 끈끈한 액체를 희미하게 느낀 것을 마지막으로, 모든 게 멀어졌다.
알렐루야는 록온의 양손을 부여잡고 봄이 되면 꼭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고, 그러고도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지 자꾸만 아쉽게 뒤를 돌아보며 멀어져갔다.
"아니 그러니까, 대체 웬 동면이냐고!!"
"낸들 알겠나."
아랍혁명군에 합류하기 위해 달려오던 셰이크 탈랄 엘 하레이딘과 압둘라 아부 두메이크가, 철도의 정찰을 겸해 데라를 경유하다 터키군에게 체포되었다는 급보가 날아들었다.
작전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조용히!"
세츠나의 불호령 같은 일갈로 일단 소란은 가라앉았지만, 누구보다 충격을 받은 사람도 다름 아닌 세츠나였다. 셰리프 나시르는 창백한 얼굴을 들어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고 있는 소년을 보았다.
"셰리프 세츠나. 데라의 현 태수는, 분명 그 자였지요."
"알리 알 사셰스……!"
세츠나는 악다문 잇새로 마치 독을 토해내듯 증오를 알알이 박아 그 이름을 씹어뱉었다.
록온도 익히 아는 이름이었다. 아이가 여덟 살 때 부족을 뛰쳐나와 가담했던 도적단의 괴수였고, 지금은 터키군 장교가 되어 있는 악명 높은 무법자. 지휘관으로서는 분명 일급이지만 사상도 신념도 없으며 오로지 돈과 피와 저의 쾌락만을 갈구하는 인간 백정.
혹독한 고문을 겪고 마침내는 잔인하게 처형될 두 사람의 운명을 상기하고 좌중은 전율했다. 타파스의 족장이자 아랍 전역에 이름을 떨치는 탈랄 엘 하레이딘이 잡힌 이상 호웨이타트가 이탈하여 손 하나가 아쉬운 이 상황에 타파스 부족의 협력을 기대할 수 없게 된 것도 뼈아팠지만, 무엇보다 두메이크는 영국군 최고의 폭약 기술자 혼비의 수제자로, 얼마 전 심장병으로 쓰러져 최전선에서 물러난 뉴컴 중령의 빈자리를 메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앞으로의 작전에 얼마만한 차질이 발생할지는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무하마드 엘 데일란이 데라를 기습해 두 사람을 구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좌중은 삽시간에 두 패거리로 갈라져 격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어느 쪽도 결론을 내지 못하고 단지 치열하게 갑론을박을 벌이는 동안, 저격수의 냉정한 사고로 이것저것 방안을 저울질해 본 록온은 셰리프 나시르에게 생뚱맞은 질문을 던졌다.
"셰리프 나시로, 탈랄 엘 하레이딘과 두메이크의 현상금을 합치면 얼마였죠?"
뜬금없기 짝이 없는 질문에 노인은 잠시 어안이벙벙해 하였으나, 곧 대강의 액수를 헤아려주었다.
"아마 100기니쯤 될 거요."
"100기니인가. 나보다는 적네요."
세츠나가 퉁기듯이 머리를 들었다.
"설마, 록온……!"
록온은 조용히 선언했다.
"내가 가겠습니다."
싸늘한 정적이 사방을 뒤덮었다.
"기습하기에는 데라의 규모가 너무 커요. 알리 알 사셰스에 대해서라면 나도 여러 가지로 주워들었으니, 어떤 부류의 인간인지 대충은 압니다. 교환 조건으로 협상해 볼게요. ──나야 영국인이니까, 뭐 그 친구들한테 제네바 협정을 기대할 순 없겠지만, 죽이지는 않을 거예요."
돌았느냐는 누군가의 외침을 신호로 짧은 정적은 산산조각이 났다. 입 가진 자들은 하나같이 격렬한 반대와 비난을 퍼부었고, 셰리프 나시르는 절망적으로 머리를 감싸쥐었으며, 그리고 세츠나는 미친 듯이 분통을 터뜨렸다. 말이 되는 소리를 지껄여라. 네가 사셰스를 알긴 뭘 안다는 건가. 그놈에 비하면 네푸드와 시나이는 차라리 어린애 장난이다. 미쳐도 이렇게 미칠 순 없다. 그 자가 협상에 응할 줄 아느냐. 목이 추가로 하나 더 떨어지는 게 고작이다. 그렇게 죽고 싶어 환장했나, 록온 스트라토스!
급기야는 격정에 사로잡혀 발작적으로 손이 닿는 전부를 할퀴어대는 아이를 록온은 끝까지 꼭 껴안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야음을 틈타 몰래 캠프를 나왔다.
"그래서, 곧장 나한테 오셨다."
"응."
타오르는 듯한 붉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알리 알 사셰스는 유쾌하게 웃었다.
"이야, 이거 오랜만에 제대로 미친 놈을 보는구먼? 내가 그 두 놈에 널 얹어서 터키에다 팔아넘길 거란 생각은 안 들디?"
"아 물론 생각했지. 하지만 말야."
록온은 한 박자 쉬고 단숨에 내뱉었다.
"아저씨는 터키에 대한 충성심 따윈 엿 바꿔먹을 만큼도 없어. 용병이면서 데라 태수의 자리까지 올라왔으면 뭐 출세도 할 만큼 했고 이미 주머니도 두둑해. 여전히 돈은 좋지만 자극적인 재미가 좀 더 고파."
"헤에?"
"나한텐 그렇게 보이던데?"
마주본 탁한 회록색 눈동자가 번들거리는 것을 확인하고, 록온은 최대로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마무리를 지었다.
"이래봬도 인물감정은 정평이 났거든."
사셰스는 걸터앉은 책상에서 훌쩍 뛰어내려 록온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앞섶이 단숨에 밑으로 좍 뜯겨나갔지만 록온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불빛 아래 하얗게 드러난 투명한 피부에 휘파람을 나지막이 불고, 사내는 거친 손바닥과는 대조적인, 기분 나쁠 만큼 부드럽고 소름끼치게 열의가 없는 손놀림으로 애무를 가해왔다.
"워어 살결이 비단결일세. 곱게 자란 공주님은 역시 뭐가 달라요."
"덩치 큰 사내자식한테 공주님은 무슨 공주님이야 아저씨……징그럽게스리."
록온은 가진 자제력을 총동원하여 본능적인 혐오감으로 굳으려는 몸을 필사적으로 제어했다. 지금 상대하고 있는 이 사내는 괴물이다. 최대한의 여유를 보여야 했다. 최소한 여유가 있는 척 가장이라도 해야 했다.
"하긴 그 따위 시시한 잔챙이들 갖곤 아무것도 못하긴 해. 에이 아저씨가 선심 썼다. 풀어주지 뭐."
"세상에 고맙기도 해라."
"대신 공주님도 선심 좀 써."
"……뭔데."
"공주님 말대로야. 아저씬 재미있는 게 너무너무 좋은데 요즘 아주 심심해 죽겠어요. 기왕 온 거 우리끼리도 내기 하나 하자구."
쇄골을 어루만지고, 목을 쓸고, 입술을 더듬으며 사셰스는 즐겁게 말했다.
"앞으로 스물 네 시간, 무슨 일이 있어도 애원을 하지 않으면 공주님도 보내주마. 어때?"
선택의 여지가 있을 리도 없었다. 록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다음 순간 양어깨를 무자비하게 잡아누르는 손아귀의 엄청난 힘에 흠칫할 겨를도 없이, 날카로운 송곳니로 목덜미를 물어뜯겼다.
"웃……!"
반사적으로 짧은 신음성을 토해낸 록온을, 사내는 강제로 일으켜 세워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에게 냅다 밀쳤다.
"정중히 예뻐해 드려."
사셰스는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부수지만 마."
병사들에게 발로 걷어채이며 끌려간 곳은 모퉁이에 있는 방이었다. 나머지 병사들이 육중한 몸으로 록온을 마구 짓눌러가며 기다란 의자 위에 묶는 동안, 하나는 시르카시아의 채찍을 들고 들어왔다. 채찍은 유연한 검은 가죽으로 만든 끈으로, 은으로 도금한 손잡이는 엄지손가락 정도의 굵기였고, 끝은 펜촉보다 더욱 날카로웠다.
병사는 채찍을 윙윙 울리며 열 대를 맞으면 누구나 용서해 달라고 울며 빌게 되고, 스무 대를 맞으면 자진해서 무슨 짓이든 시켜달라 애원하게 된다고 조롱하고는, 곧 있는 입을 다해서 채찍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가시가 달린 채찍이 부딪힐 때마다 마치 빨갛게 달아오른 철사가 온 몸을 휘감는 것 같았지만, 록온은 이를 악물로 마음속으로 숫자를 헤아렸다. 채찍이 등에 닿을 때마다 단단하고 하얀 융기가 부풀어올라 진홍색으로 붉어지고, 자국이 교차되는 지점에는 빨간 핏방울이 맺혔다. 매질이 계속됨에 따라 등은 피로 흥건해졌다. 숫자가 마흔이 넘어갈 무렵에는 더는 여력이 남지 않아, 록온은 숫자를 세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단지 비명만은 지르지 않도록 혀를 깨물어가며 힘겹게, 거의 동물적으로 남은 매질을 버텨냈다.
병사들은 10분 간격으로 교대하며 채찍을 휘둘렀지만 결국 먼저 지친 것은 그들 쪽이었다. 비명 한 번 안 지르네. 이렇게 독한 새끼는 처음 본다. 야 힘빠진다. 관두고 그거나 하나.
뻗어온 여러 개를 팔이 록온을 의자에서 끌어내려 마룻바닥에 잡아눌렀다. 바닥에 닿은 등이 끔찍스럽게 아팠지만, 아니나다를까 하반신을 풀어헤치고 다리를 버리는 것에 그만 어처구니가 없어져 한순간은 통증마저 잊을 뻔했다. 취향도 고약하지. 대체 6피트짜리 시커먼 사내자식이 뭐가 좋다고. 록온은 작게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아버렸고, 몸이 두 쪽으로 쪼개질 듯한 지독한 고통이 연속으로 엄습해오는 것을 멍해진 머리로 묵묵히 견뎠다.
채찍의 끄트머리가 몸 속으로 우악스럽게 파고들어왔을 때는 순간적으로 눈앞이 하얗게 바래며 지난 생애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기도 했으나, 그래봤자 지난 2년 동안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과거를 하도 여러 번 봐서 지루한 대목에서는 졸 수도 있을 정도였다. 록온은 제 생각이 우스워져 피식피식 웃었고, 아마도 그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병사가 뾰족한 부츠로 오른쪽 옆구리를 세게 걷어찼다.
그 다음부터는 숨을 쉴 때마다 부러진 늑골이 날카롭게 폐를 찔러대는 것에 대부분의 신경이 쏠렸으므로, 오히려 고맙기까지 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이봐, 괜찮으셔 공주님?"
위를 보았다. 희한하게 궁상맞은 폼으로 쭈그리고 앉은 사셰스가 있었고, 병사들은 없었다. 아저씨 눈엔 이 꼴이 괜찮게 보이냐고 핀잔을 주고 싶었지만, 다치고 말라붙은 목에선 유감스럽게도 소리다운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사셰스는 웃고는, 물먹인 솜처럼 무겁게 멍청하게 마룻바닥 위에 널브러진 록온의 손목을 움켜쥐고 확 비틀어올렸다. 상반신이 맥없이 딸려올라가고, 어깨에서 우드득 소리가 나며 끔찍한 통증이 척추를 관통했다.
뼈가 빠졌겠다. 록온은 남의 일처럼 생각했다.
사셰스는 록온을 짐짝처럼 질질 끌고 가 침대에 내동댕이쳤다. 입맛을 다시면서 허리띠를 끄르고, 야수 같은 사내는 무감각한 하얀 귓불을 씹으며 다정스레 속삭였다.
"근성은 칭찬해 주겠지만, 진짜 파티는 이제부터야, 공주님."
문이 닫혔다.
갈빗대 사이에 박힌 칼날이 서서히 옆으로 비틀리는 것은 죽도록 아팠지만, 귓속에 쑤셔박혀 끈적하게 들락날락하는 두툼한 혀도 만만찮게 견디기 힘들었다. 록온의 머릿속 가장 깊숙한 곳에 남은 냉정한 부분이 욕설을 퍼부었다.
젠장, 이 망할 놈의 변태. 한 번에 하나만 하란 말이다.
──…… 온!
──록온!!
──록온 스트라토스!!!
낯익은 목소리가 낯선 이름을 절박하게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록온 스트라토스……그게 누구였더라. 아아, 그래. 나였지. <여기>선 그게 내 이름이었다.
천근 납처럼 무겁게 가라앉는 눈꺼풀을 순전한 의지의 힘으로, 가까스로 밀어올렸다.
희뿌연 영상이 어지럽게 흔들리다 마침내 제 윤곽을 찾았다. 고집 센 까만 머리카락. 커다란 적갈색 눈동자. 가무잡잡한 얼굴. 세츠나. 어리지만 굳센 아이.
왜 그래 세츠나. 무슨 일이야. 어째서 울 것 같은 표정이야. 그런 얼굴 하지 마. 안 해도 돼.
돌아왔잖아. 다 살아서 돌아왔잖아. 난 아무렇지도 않아. 양쪽 팔, 양쪽 다리, 손가락, 전부 다 붙어 있어. 어쩐지 오른쪽 눈이 잘 뜨이질 않지만 아마도 대수롭지는 않아. 괜찮아. 정말 괜찮으니까. 그러니까.
울지 마.
셰리프 나시르의 외침도 아련하게 들려왔다. 빌어먹을, 록온, 록온 스트라토스! 정신 똑바로 차려요! 셰리프는 당신이 죽은 줄 알았단 말입니다! 노인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생경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어, 듣는 이쪽마저 당황스러웠다. 얼른 위로해드리지 않으면. 노인을 놀라게 하면 안 되지. 응, 걱정 말아요. 일어날게요. 일어나야죠. 일어나야 하는데.
손끝 하나도 까닥할 수가 없었다.
세츠나가 무언가를 더 말했으나, 의미가 되지 않는 소리는 귓전을 맴돌기만 할 뿐이었다. 아이의 제 나이보다 낮고, 메마르고 건조한 목소리가 자제심을 잃고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는 것만을 알았다. 아이를 안심시키고 싶어 웃어 보이려 애썼지만, 제대로 웃었는지는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뺨 위로 흘러내리는 뜨겁고 끈끈한 액체를 희미하게 느낀 것을 마지막으로, 모든 게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