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사막에서는 물 한 방울도 귀중한 보고
Chapter 2.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는 뻘소리는 작작하고 그냥 건너라
Chapter 3. 무모함이 도를 넘으면 귀신도 질린대더라
Chapter 4. 남자의 헌팅 대사는 예나 지금이나 발전이 없다
Chapter 5. 바보와 가위는 쓰기 나름
Chapter 6. 잠자는 공주는 원래 변태성욕자의 이야기라죠
Chapter 7. 애들은 모르는 사이에 알아서 자란다
Chapter 8. 참을성도 삼세 번까지
Chapter 9. 나쁜 일은 언제나 한꺼번에 터진다
Chapter 10.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데 정말이긴 한 거냐
Epilogue. 그리고,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다
Chapter 3. 무모함이 도를 넘으면 귀신도 질린대더라
사랑하는 라일에게
밥은 잘 먹고 샤워캡은 벌레는 안 붙고 인도에서 실어온 후추가 희망봉에서 노획당하듯이 이 형의 애타는 마음을 그것이 사랑 비극적으로 그리운 별은 빛나고 작열하는 태양과도 같이 5분만 더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우물이 있기 때문이지 내 영혼의 닭고기 잠은 잘 자고 모래바람이 눈을 형은 잘 살아 있 일곱 개의 기둥이 보고 싶다 내 새끼 아빠 오늘도 무사히 당신은 더 이상 날 사랑하지 않는군요 세츠나가 무지 귀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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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뭘 하고 있나?"
본격적인 네푸드 원정에 앞서 느긋한 휴식으로는 마지막이 될 쿠르의 오아시스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결정 본 김에 풍요로운 야자수 그늘을 차지하고 앉아 의미도 없이 세기의 문학작품을 낳으려 낑낑대고 있던 록온은, 열 여섯답지 않게 낮고 허스키하며 그가 나고 자란 사막처럼 메마르고 건조한 목소리에 힉겁해서 고개를 반짝 들었고, 구깃구깃한 종이뭉치에 발을 파묻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록온을 째려보고 있는 작고 회초리처럼 호리호리한 검은 로브의 소년을 보았다. 오늘도 귀여웠으므로 록온의 입가는 절로 노골노골하게 풀어졌다.
……엉? 종이뭉치?
"─────────허걱."
반경 2미터를 깡그리 뒤덮은 종이뭉치의 산, 산, 산과 덤으로 엄청난 집념으로 죽어라 구긴 편지지를 서른세 번째로 투척하려 들어올린 제 팔을 뒤늦게 깨달은 록온의 뒤통수에 왕따시만한 식은땀이 대롱대롱 매달렸다. 기억이 전혀 없는데 설마 킹 크림슨의 농간인가!
스탠드를 찾으며 현실도피를 해봤자 뻘한 사태는 호전되지 않았으므로, 무표정하게 황당해 하는 고등기술을 구사하는 세츠나에게 록온은 머리를 긁적이며 헤실 웃어보였다.
"에─에에또, 러브레터?"
세츠나가 조인트를 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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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두 시에 정조를 위협당한 처녀 같은 비명이 진동했다.
당연했다. 벤케이도 싸쥐고 징징거린다는 자리다.
돌같이 단단하고 바위처럼 조용한 하리스의 사내들은, 물을 긷거나 낙타에게 물을 먹이거나 휴식을 취하거나 혹은 삼삼오오 모여서 빵을 씹는 등 내일의 원정을 바지런히 준비하던 손길을 잠시 멈추고 문제의 방향으로 일제히 눈과 귀를 모았다.
"지……지금 진짜……진짜 아팠……! 뭐, 뭐하는 거야 세츠나?! 불만이 있으면 우선 말로 합니다! 무조건 폭력에 호소하면 좋은 어른이 되지 못한다고 유치원에서 배우지 않았……아니다 여기 아랍이었지? 아무튼 폭력은 못 쓰고……이봐요 세츠나 군!? 일단 사람 말부터 좀 듣……어, 그거 내 만년필, 히에에에에에엑!? 우왓 안됩니다 오아시스는 모두의 것입니다! 쓰레기 투하는 안됩……아니아니 쓰레기가 아니지만? 야 어디 가! 만년필 돌려줘! 나도 선물받은 거란 말야, 만년필이 맘에 들면 내가 나중에 하나 사줄……세츠나! 세츠나 군! 세츠나 씨! 세츠나 소란 이븐 엘 이브라힘─────!!!"
한 마리 살쾡이처럼 능숙하고 유연하게 도망다니는 그들의 셰리프와 필사적으로 뒤를 쫓는 영국 미인, 이 아니라 영국군 중위를 한동안 진지하게 주시한 후, 하리스의 장정들은 서로간에 눈짓을 교환했다.
"저건……."
"음."
"즉……."
"역시."
"과연."
"드디어."
"언제?"
"곧."
"글쎄……."
"아니라고?"
"아무래도."
"어째서?"
"아직은."
"하지만……."
"그렇게?"
"틀림없어."
"그렇다면."
"우리가."
"음."
"응당."
"반드시."
"어떻게든."
사막의 사나이들은 과묵하다.
록온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러고도 족히 30분은 더 난리부르스를 추고,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소중하고 귀하고 이쁘고 기타 등등한 동생에게 쓰는 편지라 해명하고 나서야 가까스로 만년필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아랍인도 아니며 보통은 산처럼 움직이지 않는 게 임무인 저격수 주제에 노구를 이끌고3) 뙤약볕 아래를 선불맞은 망아지같이 이리 뛰고 저리 뛴 대가로 그날 밤은 쑤시는 근육과 아픈 허리와 쪼개지는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 앓아야 했지만, 어쩐지 조금 실쭉한 세츠나가 겁나게 귀여웠으므로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아졌다.
그나저나 밤새 내내 뭔놈의 수상쩍은 헐떡거림이 그리 많이 들렸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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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가 네푸드다."
세츠나는 언덕 아래, 끝없이 뻗어 있는 철도의 건너편, 광막한 땅을 가리켰다.
"여기서부터는 반대편에 닿을 때까지는 우리가 싣고 가는 물만으로 버텨야 한다. 낙타들에게 먹일 물은 없어. 스무 날이 지나면 약한 놈부터 쓰러지기 시작하겠지. 아무리 강인한 낙타도 삼십 일 이상은 버티지 못해. ──낙타가 죽으면, 우리도 죽는다."
세츠나의 어조는 늘 그렇듯 담담했으나, 밑바닥에는 예민한 사람이나 간신히 눈치챌 희미한 긴장이 도사리고 있었다. 사막에서 태어나 사막과 함께 살고 사막에서 죽는 베두인조차 감히 범접하지 못하는, 신에게 버림받은 가혹한 대지. 지금 이 아이는 그 땅에, 천혜의 요새에 도전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혼자가 아닌, 소년을 신뢰하고 따라온 쉰 명의 목숨과 함께.
가녀리기만 한 열 여섯의 어깨에게는, 그 무게가 아직은 조금쯤 버거우리라.
"그럼."
록온은 씨익 웃었다.
"여기서 미적거릴 틈은 없겠네. 뭐해? 어서 안 가고."
세츠나는 곁눈질로 록온을 흘겨보고 보란 듯이 한숨을 픽 쉬었다.
"머리통이 홀가분해서 좋기도 하겠군."
"뭐, 머리통이 홀가분……?! 야이 애 녀석 말빨하곤……! 이 형님 진짜로 웁니다. 울 겁니다! 내가 태평한 건 다 정당한 이유에서라구!"
"하아?"
"그치만, 세츠나 소란 이븐 엘 이브라힘이 여기 있잖아."
뭐가 그리도 희한했는지 커다란 적갈색 눈동자를 더욱 커다랗게 뜨고 이쪽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아이는 욕나오도록 사랑스러웠으므로, 록온은 기꺼이 충동에 백기를 들고 소년을 덥석 끌어안아 머리를 쓰담쓰담했다.
"어이어이 욘석아, 표정이 그게 뭐야. 왜, 형아 마음에 감동했쪄요~? 괜찮아 괜찮아, 세츠나는 잘할 수 있어. 두고 봐. 틀림없이 스무 날 후엔 건너편에서 역사를 새로 쓰고 있을 거라니까?"
잠시간 거침없는 손길에 머리를 내맡기고 벙쪄 있던 아이는 그러나 곧, 짜증 만땅으로 록온의 손을 뿌리치곤 대놓고 부비적대는 통에 보기 좋게 비뚤어진 두건을 고쳐 매었다.
"물론 문제없다. 내가 건담이다."
"오 바로 그거야 그……으잉? 건담?"
"출발!"
소년을 선두로 사내 쉰 명과 낙타 일흔 마리는 언덕을 달려내려갔다.
건담인지 간담인지 건덤인지가 대체 뭐에 쓰이는 물건인지 물어볼 여유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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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푸드 사막에 발을 들인 이후로는 햇볕이 너무나 강렬하고 후끈후끈한 열기가 극도에 달해 도저히 행군이 불가능한 대낮의 두세 시간을 틈타 눈을 붙이는 것을 제외하면, 낮에는 쉬임없이 달리고 밤에도 살을 에일 듯한 추위를 불사하고 오로지 희미한 별빛과 감에 의지하여 화산지대건 능선지대건 협곡이건 가리지 않고 뚫고 가는 초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웬만한 정신력 가지고는 하루도 버티지 못할 짓을 최소한 스무 날. 상상만 해도 진저리가 처질 일이었지만 록온은 마음 하나는 지극히 편안했다. 이럴 때는 무조건 지극히 편안한 것이 최선이었다.
훈훈한 일도 많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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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 24>
세츠나는 작다. 작심하고 덤벼들면 반짝 안아올릴 수 있을 만큼 작았다.
하도 애가 작고 가냘프길래 불문곡직하고 재어봤더니 애초에 가늠했던 대로 5피트 4인치에 113파운드였다. 분개한 아이에게 있는 힘을 다해 짓밟힌 발등을 문지르면서 록온은 제 눈썰미를 자화자찬했다.
발등을 호되게 찍고도 성이 안 차 이어서 손목을 틀어쥐고 발을 걷어차 거의 10인치는 더 큰 록온을 단번에 엎어뜨렸으니 (엎고는 대뜸 올라타서 콧등까지 물어뜯었다. 넌 야수냐!) 좀 작다고 싸우는데 지장이 있지도 않고 하리스는 그들의 나어린 셰리프를 마치 영웅처럼 열광적으로 숭배하고 있고 무엇보다 귀여우면 장땡이라지만, 한 입에 삼키기엔 양고기 덩어리가 너무 컸고 그 자리에 하임리히법을 아는 자가 하나도 없어 불운하게 세상을 등진 숙부에게서 메디나 전투 직후 날치기로 셰리프 자리를 물려받은 일은 세츠나 개인에게는 다소간 불행이었다.
족장의 로브가 맞질 않았던 것이다.
자애로운 주름에 지혜와 경험과 니나노 정신이 세월 따라 쌓인 셰리프 나시르가 록온에게 귀엣말로 알려준 바에 의하면, 옷을 줄이겠답시고 덤벙대는 부족민들을 세츠나는 처음에는 침묵으로 인내하고 나중에는 죄 주먹으로 입 닥치게 한 후 그 이상의 반론을 봉쇄하는 짧고도 확고한 선언으로 모두를 감동의 물결로 휩쓸어버렸다고 했다. <키는 자란다>.
배를 쥐고 조용히 뒹군 뒤 일을 무사히 마치고 카이로로 돌아가면 우유도 잊지 말고 공수하자 결심한 록온이 마음속 메모에 중요 사항으로 기입하건 말건, 세츠나는 대략 두 사이즈 큰 옷을 오기인지 뭔지로 무심한 듯 쉬크하게 감내하고 있었지만 허리는 어떻게 졸라맬 수 있어도 소매는 그리 안되는 게 비정한 현실이었다.
하루에도 수천 번씩 묵묵하게 흘러내리는 소매를 접고 걷기를 되풀이하는 세츠나를 곁눈질하며 숫자를 헤아리다 여덟 살 더 먹은 나이도 속절없이 먼저 끈기가 닳아버린 록온은, 결국 휴식 시간을 틈타 짐을 바닥까지 뒤져 분명히 넣어온 문제의 물건을 찾아냈다.
"어이 세츠나, 이리 좀 와 봐라. ……얌마! 왜 경계하고 그래!"
고양이처럼 털을 빳빳이 세우고 엄청난 스피드의 백스텝으로 우선 내빼고 보려는 아이를 붙잡고 늘어지고, 괘씸죄로 헤드락을 한 번 걸어주고, 대가로 아킬레스건을 걷어채이고, 아웅다웅 엎치락뒤치락 실랑이 끝에 절대적인 키와 체중의 차이를 십분 활용해 우격다짐으로 아이를 뒤에서 포옥 껴안고 냅다 앉아버리기까지 딱 15분이 걸렸다. 형, 미성년자 성희롱은 범죄거든. 상냥하게 웃으며 엄지를 밑으로 꼴아박아 줄 라일은 슬프게도 카이로에 있었다. 왠지 급속도로 치밀어오르는 살의에 몸을 떨며 한손으로 약병을 뽀개어 새로 입원한 어느 고위 장성의 맥빠진 심장이 그나마 하던 업무마저 포기할 뻔했지만 어디까지나 여담이고, 카이로의 사정을 알 리 없는 형님은 온몸으로 짜증을 팍팍 뿌리면서도 체념했는지 일단은 얌전히 안겨 있는 세츠나의 팔을 들어올리고 일행 전부가 흥미진진하게 주시하는 가운데 짐 밑바닥에서 뽑아온 새빨간 끈 두 줄을 잡고 작업을 개시했다.
"자, 어디 보자……이렇게 하고, 이렇게 묶고, 이렇게 돌리고, 이렇게 잡아서 이렇게 요렇게 저렇게……오케이, 다 됐다!"
1초에 매듭 열 개 짓는 번개같은 손놀림으로, 닐 L. 디란디가 어느 일요일 오후 의미도 없이 고안한 끔찍스럽게 복잡하고 소름끼치게 러블리하며 닭살 돋도록 큐트한 나비매듭을 지어 양쪽 소매를 고정한 록온은 성취감에 상큼하게 땀을 씻었다. 이젠 절대 흘러내릴 염려가 없다고 세츠나의 머리를 토닥여주고, 남은 시간 선잠이나마 자고자 몰래 뒤나메스라 이름지은 제 낙타에게로 발길을 돌렸으나, 라일의 머리에 문제의 매듭을 의기양양하게 선보였다 소금 넣은 팬케이크를 억지로 입에 쑤셔박는 고문은 둘째치고 닷새를 내리 무시당한 끝에 서러운 나머지 가족 영정을 껴안고 청승을 떨다 등짝만 조낸 밟힌 쓰라린 기억이 노도처럼 엄습하였으므로 눈물짓기에 바빠 뒤에서 말없이 흑화한 세츠나가 잠자코 엄지를 치켜올린 부하 여러분을 양손에 휘어잡은 시미타르 네 자루로 무자비하게 쳐날리는 광경은 미처 보지 못했다. 후드려패는 쪽도 후들겨맞는 쪽도 얼굴만은 무덤덤한 꼴이 구경하기에 약간 호러이긴 했다.
그리고, 세츠나가 매듭을 풀어보려 꼬박 세 시간을 낑낑댄 끝에 성과는커녕 잠잘 여가만 홀랑 까먹고 낙타에 도로 올라야 했고, 매듭을 가리키며 비웃, 아니 폭소, 아니 박장대소, 아니 인자하게 미소 짓는 셰리프 나시르의 턱수염을 홧김에 죄 뽑아버렸다는 것은, 록온만이 모르는 뒷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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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 31>
"물 낭비다."
세츠나가 퉁명스레 내뱉었다.
팔뚝을 둥둥 걷어붙이고 셰이빙 크림을 얼굴에 한가득 쳐바른 채 가죽띠에 열심히 면도칼을 갈다가 록온은 어깨를 움츠렸다. 자기 관리 철저한 영국신사에게 물 한 방울이 아까운 사막이라 해서 아침 면도를 거르는 일 따위는 애초에 용납되지 않는 법이다.
"좀 봐주라. 나도 귀찮아 죽겠어."
"기르면 되잖나."
"어울릴 얼굴도 아니고요, 수염은 깎으라 있는 거라고 20년을 설교 듣고 살면 누구나 파블로프의 개가 됩니다. 아침에는 자동적으로 몸이 반응하는데 어째."
주기적으로 면도를 할 수밖에 없는 코카소이드 성인 남성의 숙명을 침울히 반추하다 록온이 중동은 풍성한 수염을 숭상하고 권장한다는 엄연한 사실과 덤으로 이웃집 김씨 아줌마급 눈칫빨까지 새까맣게 망각하고 한 말은 다음과 같았고,
"세츠나는 좋겠어─빰도 야들야들하고, 별로 수염 날 체질도 아닌 것 같던데. 앞으로 살기 얼마나 편하겠냐."
그 말이, 애라고 얕보이는 데 진력이 나 어떻게든 수염 좀 길러보려 기를 쓰다 나는 둥 마는 둥 듬성듬성 솟는 수염빨에 좌절하고 부족민 전체가 옷자락에 매달려 읍소, 호소, 애소하며 말리는지라 우울하게 칼을 들어야만 했던 세츠나의 뼈아픈 과거를 건드릴 줄은 차마 몰랐다.
강렬한 킥이 뒤통수에 작렬했고, 록온은 수염 아닌 코를 벨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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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 46>
사막의 경치는 단조롭다.
너무나도 눈둘 데 없이 단조롭고 낙타의 움직임은 지독히도 리드미컬해, 올라탄 사람을 꿈의 나라 서쪽 나라로 보내기가 십상이었다. 사막에서 잔뼈가 굵은 베두인조차도 조금만 정신을 놓을라치면 꾸벅꾸벅 졸기가 다반사이니 말해 무엇하랴.
개중에는 등을 꼿꼿이 편 채로 걸지게 잘 자는 기술을 타고난 행운아도 가끔 있지만 대부분은 졸다 보면 이리 휘청 저리 휘청대다 십에 팔구 낙타에서 떨어지고, 낙타에서 떨어지는 것은 사막에서 바로 죽음으로 직결된다.
불상사를 막는 최선의 방법은 눈을 똑바로 뜨고 삶의 의미를 묵상하며 메디테이션으로 인내하는 것이었다. 이러니 사막을 건너다 대오각성한 수행자의 숫자는 헤아려봤자 귀찮기만 하고, 세계의 3대 종교 중 두 개가 사막에 근원을 두고 예언자들이 걸핏하면 오지에 틀어박힐 만도 했지만 록온 스트라토스와 철학은 별 인연이 없었다. 그리고 중증 브라콤의 동생아그리워보고싶다흑흑에도 한계는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정오 무렵에 이르러 앞으로 꾸벅 뒤로 꾸벅 꿈나라로 어기영차 노를 젓고 있는 록온을 무언으로 흘기고, 세츠나는 회초리를 들어 드러난 목덜미를 냅다 후려쳤다.
"익!"
"졸지 마라. 떨어지고 싶나."
부지불식간에 얻어맞은 자리를 감싸쥐고 고개를 박은 채 아파하는 록온에게 세츠나는 냉정히 핀잔을 주었다. 내심 새하얀 목덜미에 새겨진 빠알간 자국이 꽤 짜릿하다고 덤덤하게, 어디까지나 덤덤하게 곱씹으면서.
뭔가에 눈을 뜰 징조를 보이고 있는 세츠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나이 헛쳐먹은 어른은 우는 소리로 씨알도 안 먹힐 변명을 했다.
"……아, 안 잤어! 우주의 신비를 새삼 경이롭게 바라보고 있었다구! 인생 살기가 지긋지긋해질 때면, 브라운 부인, 세상 일이 제대로 풀리는 게 없고, 세상 사람들이 다 짜증나고 병신 같을 때, 이제 살 만큼 살았다고 느껴질 때면4),"
"침이나 닦고 우겨라."
"우에엥 우리 애가 너무 쉬크해요! 형은 울고 싶습니다!"
징징대는 시늉이나 하고 있는 한심한 어른한테 잔소리를 하기도 귀찮아져 대뜸 등짝을 발로 질러주자 쨍알거림이 뚝 멎었다. 폭력도 때로는 꽤 쓸만하다.
록온은 여지껏 따끔거리는 목덜미와 아픈 등짝을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다.
"미안해. 두 번 다시 안 그럴게."
그리고는 오른손을 들고 나름 진중하게 덧붙였다.
"서약. 내가 또 졸면 성을 갑니다. 록온 트로포스로."
20분 만에 깨졌다.
문제의 어른은 아예 가슴께에 코를 박고 쳐자고 있었고, 세츠나의 관자놀이에서는 런던에 비할 만한 복잡한 지형도가 불룩불룩 튀어올랐다.
맹세를 깨뜨리는 자에게는 응분의 처벌이 따라야 하는 법.
아이는 잠자코 '왜 그래야 하지?' 란 심오한 의문에 사로잡혀 있는 무하마드 엘 데일란을 손짓으로 불러 낙타의 고삐를 대뜸 떠넘겼다. 이어서 가뿐한 몸놀림으로 뒤나메스에 훌쩍 옮겨 탄 세츠나는, 등뒤에 적절히 자리를 잡은 후 부드러운 갈색 곱슬머리를 가볍게 헤치고는, 밑으로 드러난 하얀 귓불을,
물었다.
덥석.
"히, 히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새벽 세 시에 떼거리로 정조를 위협당한 처녀 같은 비명이 진동했다. 참고로 디란디 유전자는 대대로 귀가 약하다.
귀 안팎을 샅샅이 핥고 빠는 사이 비명은 어느 틈엔가 숨넘어가는 헐떡거림으로 바뀌었고, 울고 불며 반 헛소리같이 제발 그만하라는 애원이 중언부언 이어졌지만 세츠나는 가늘되 힘 있는 양팔로 미친 듯이 튀어오르는 어깨를 꽈악 내리누른 채 차분히 제 할 일만을 했다.
록온이 그예 뻗어버려 낙타에서 내리지 않는 한 더는 과업 수행이 힘들어지자, 세츠나는 미묘한 충만함과 한층 미묘한 아쉬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상반신을 일으켜 손을 털고 애락(愛駱) 엑시아의 등으로 귀환했다. 타액에 흠뻑 젖고 벌겋게 달아오른 귓전에, 졸고 싶으면 얼마든지 졸아도 좋다는 나지막한 협박을 남기기도 잊지 않았다.
숨소리 하나 나지 않는 고요함 속에 시종일관 다 지켜본 쉰 쌍의 손은 주저없이 엄지를 치켜세워 그들의 족장을 찬미했고, 록온은 죽고 싶은 심정으로 뒤나메스의 믿음직한 등에 널브러져 남자라서 자연히 따라온 생리 현상을 무슨 수로 무마해야 할지 훌쩍훌쩍 울며 고민에 빠졌다. 위에서 별 발광이 다 벌어져도 끝끝내 보조를 흩트리지 않은 뒤나메스의 우수함이 새삼 뼈에 사무쳤다.
그리고 록온은 그 후 단 한 번도 졸지 않았다. 몸으로 배울수록 학습이 빠른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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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 55>
하리스의 여러분도 록온에게 친절했다. 실은 좀 부담스럽도록 친절했다.
순서를 정해놓고 돌아가면서 때 되면 텐트 쳐주고 빵 구워주고 물 따라주고 모래 털어주고 옷 개어주고 담요 덮어주고 짐 들어주고, 뭔가 이러려고 네푸드에 오진 않았을 텐데 이 강건한 사내들은 종자 노릇을 마다하기는커녕, 세츠나와 부대낀 덕에 차차 하리스의 복잡섬세한 내적 동향을 읽는 방법을 익힌 록온의 눈이 삐지 않았다면, 은근히 즐거워까지 하며 잡일을 떠맡고 있었다.
공짜로 쉰 명을 부려먹는 기분이 너무나도 찝찝해 친절은 고맙지만 혼자서 할 수 있다고 여러 번 거절해 보았으나, 하나같이 초지일관 무표정하게 고개만 끄덕끄덕하고 말 귀에 바람 불고 쇠귀에 염불한 듯 하던 일 그냥 재개하는 덴 뭐 방도가 없었다. 벽에 대고 악쓰는 심정이 이러리라.
급기야는 이 사람들이 대체 왜 이러나 싶어 살살 겁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어느 동화인가 비슷한 얘기가 있었던 것도 같다. 어 설마 튼실하게 살찌워서 구워먹고 튀겨먹고 비벼먹을 작정은 아니겠지요 아하하하하하하. ……난 늙은 고기라서 맛없어!!5)
록온의 의혹은 하리스치고는 그나마 안면 근육이 좀 움직이는 편인 가심이 맛있게 구워진 반죽의 검은 재를 정성껏 털어 정중히 내밀 무렵 절정에 달했다. 친절은 친절이고 털고도 재가 여전히 묻어 있었으므로 저격수의 생명인 손을 보호하려 사막에서도 근성으로 끼는 장갑을 벗고 감사히 받아들려 했을 때, 거칠고 가무잡잡한 손이 록온의 손을 와락 잡았다.
"……엉?"
굼실굼실.
굼실굼실.
굼실굼실굼실굼실.
마치 푸줏간의 고기를 가늠하듯 집요하고도 끈덕지게 손바닥의 근육을 하나하나 만지고 손가락을 확인하고 손목을 더듬고, 그러고도 한참을 더 잡고 있다가 아쉽게 손을 놓아주었다. 식은땀을 폭포수처럼 흘리면서 빠직빠직 굳어버린 록온에게 머리를 살짝 숙여보이고, 가심은 경쾌하게 폴짝거리며 눈을 하이에나 모양 빛내고 선 일행에게로 돌아갔다.
삼삼오오 무리지은 남자들에게서 하리스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판돈'이라느니 '운좋은 놈'이라느니 '나도 한 번만'이라느니 모옵시 불온한 단어들이 속닥속닥 새어나왔고, 록온은 마음속으로 God Save the Me를 끝도 없이 중얼거리며 이건 또 이거대로 의미를 알 수 없지만 귀여우니 만사 오케이인, 옹송그리고 옆에 바싹 붙어 앉은 세츠나에게 쭈뼛쭈뼛 말을 걸었다.
"저 말야, 세츠나……?"
아이는 고개를 외로 틀어 록온을 힐끗 보았다.
"문제없다. 내가 건담이다."
선문답의 모범적인 예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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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 68>
새까만 돌산이 별빛마저 흡수하여 앞도 변변히 보이지 않는 한밤중에 날카롭게 돌출한 절벽을 돌아 가파른 언덕을 오르느니 죽고 싶어 환장했으면 목을 매는 편이 차라리 손쉽고 빨랐으므로, 그날 밤은 야영을 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록온은 다리를 접고 얌전히 붙어 앉은 뒤나메스의 온기를 만끽하며 담요를 둘둘 말고 오랜만의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동생의 F컵 슴가가 가슴팍에 삶의 무게로 터억 얹혀 오는 개꿈을 꾸었다.
라일아 얘야 브래지어는 어쨌니……이 형아 노브라만은 용서 못합니다 그런 난잡한 애로 키운 기억은 없습니다 하다못해 가죽띠라도 두르려무나……야 벗긴 왜 벗어! 벗지 마 이놈아! 보지 마 이것들아! 펄펄팔팔 날뛰다 지 잠꼬대에 지가 화들짝 놀라 깨어보니 등골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고 뭔가 시커먼 것이 몸 위에 올라와 있었다.
도로 기절할 뻔했다.
제 팔이 문제의 물체에 치덕처덕 휘감겼음을 때맞춰 깨달은 덕분에 정신을 수습하고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정황을 파악할 여유를 얻었다. 품안에 쏘옥 갈무리된 자그마한 물체의 정체는,
"……얼레? 세츠나……?"
F컵 슴가 대신 세츠나의 머리가 흉곽을 인정사정없이 압박하는 이 상황이 무슨 조화인지 알 턱은 없었으나, 평소의 무감정한 얼굴을 살짝 풀고 록온에게 치댄 채 새근새근 자고 있는 아이는 돌아버리게 사랑스러웠다. 까짓 하룻밤 베개 노릇도 불사할 만큼은.
뒤편에서 엑시아와 뒤나메스도 사이좋게 몸을 붙이고 어우러진 가운데, 록온은 아이를 조심스럽게 도로 껴안고 다시금 잠에 빠져들었고, 이번에는 사벨타이거에게 쳐밟히는 꿈을 꾸었다.
귀여움은 세계를 구한다.
비록 그 표정이 포식자의 배부른 미소와 흡사하더라도.
‡ ‡ ‡ ‡ ‡
열 아흐레째 되는 날, 새벽 다섯 시경, 물이 바닥을 보일 무렵, 일행은 최후의 난관인 <태양의 모루>를 돌파했다.
‡ ‡ ‡ ‡ ‡
록온은 비로소 긴장을 풀고 어깨를 폈다.
"세츠나, 우물에는 언제쯤 도착하겠어?"
"이대로라면, 정오에는."
세츠나의 무뚝뚝한 목소리도 희미하게나마 들떠 있었다. 이제 하늘에서 불벼락이 떨어지지 않는 한 네푸드 원정은 성공으로 막을 내릴 것이었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고쳐 썼다는 실감은 누구에게나 가슴 벅찬 감동이다. 하물며 열 여섯 소년이라면, 더욱.
록온이 웃고 아이의 자그마한 머리통을 쓰다듬으려 손을 내밀었을 때, 한켠에서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자알이 무리에서 벗어나 어슬렁거리는 낙타를 발견한 것이다.
안장주머니와 소총, 식량은 멀쩡히 붙었지만, 정작 타고 있어야 할 가심은 없었다.
삽시간에 섬뜩한 떨림이 일행 전체를 덮쳤고, 셰리프 나시르는 욕설 섞인 탄식을 내뱉으며 낙타의 옆구리를 내리쳤으나, 세츠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낙타를 몰아 앞서나가는 아이에게, 록온은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따라붙었다.
"돌아가지 않을 거야, 세츠나?"
"어째서."
"가심이 뒤에 있어!"
"그래서, 마흔 아홉 명 전부를 죽일 셈인가."
세츠나의 어조는 여전히 퉁명스러웠지만, 록온은 돌아보려조차 하지 않는 가늘고 꼿꼿한 등을 설핏 스치고 지나간 경련을 똑똑하게 알아보고 말았다.
결심이 완전히 섰다.
록온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말했다.
"내가 갈게."
"──뭐?"
"셰리프는 더 많은 사람을 책임져야지. 하나쯤은 외부인한테 떠넘겨."
"미쳤나!"
록온은 더 이상의 언쟁을 포기하고 즉각 고삐를 잡아당겨 낙타의 머리를 뒤로 돌렸다. 낙타는 떼를 지어 사는 데 익숙하고 흔히 동료들을 떠나길 몹시 싫어하지만, 뒤나메스는 순순히 복종했다.
경악과 당황이 뒤섞인 웅성거림이 사방에서 일었다. 셰리프 나시르조차 침착성을 잃고 황급히 길을 가로막고 나섰다.
"태양의 모루로 돌아가다니, 자살 행위요! 죽으려고 작정했습니까!"
"셰리프 나시르, 비켜주세요."
"포기해요, 록온 스트라토스. 가심의 때가 온 거요!"
"때가 되어봐야지 압니다."
단호히 노인을 물리치고 뒤나메스에 박차를 가해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려다, 록온은 일순 멈칫하며 뒤를 보았다.
세츠나의 손이 팔을 움켜쥐고 있었다.
"록온 스트라토스!"
"세츠나, 아파."
"이러려고 우리를 여기까지 끌고 왔나!"
"세츠나."
소년의 강철 같은 손가락이 무작스럽게 피부에 파고들었다. 날선 손톱이 아팠지만, 록온은 어쩐지 멍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분노한 야수의 포효와도 같은 신음성을 토하는 이 아이는 무척이나 강하고도 애틋한 아이라고, 때에 맞지 않는 생각을 했다.
충동적으로 몸을 숙여 아이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눌러댔다.
숨을 삼키며 파르라니 굳은 세츠나를 부드러운 몸짓으로 밀어내고, 록온은 미소를 지었다.
"돌아올게."
세츠나는 두건을 잡아뜯어 바닥에 내팽개쳤다.
‡ ‡ ‡ ‡ ‡
태양이 드디어 중천에 걸렸다.
록온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정면을 응시했다. 변화무쌍한 사막의 신기루가 시야를 어지럽혔다.
‡ ‡ ‡ ‡ ‡
저 미친놈이 돌아올 때까지 나도 예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다고 땡깡을 부려대는 셰리프를 부하들이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겨우겨우 마이구아 우물로 모시고 갔지만, 고함지르고 악을 쓰기보다 더욱 무시무시한 침묵 속에서 신경질적으로 불씨만 쑤시고 있는 세츠나에게 감히 접근할 엄두는 하리스의 강건한 사내들도 차마 내지 못했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고, 다섯 시간이 흘렀다.
아직 경험이 부족한 몇몇이 정신적 압박을 못 이겨 나가떨어질 즈음, 세츠나는 막대기를 던지고 벌떡 일어났다. 수십의 시선이 그들의 셰리프를 따라 다 함께 한 방향으로 쏠렸다.
보초로 남겨놓고 온 다훔이 소리를 지르고 손을 흔들며 달려오고, 사람 둘을 실은 뒤나메스가 활발한 발걸음으로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환호성이 일대를 휩쓸었다. 사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리를 박차고 달려나갔다.
하리스 특유의 덤덤함도 잠시 잊고 열광적인 흥분에 사로잡힌 사내들에게 겹겹이 둘러싸여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게 되자, 영리한 뒤나메스는 맵시 있게 다리를 접고 주인을 내려놓았다. 일부는 사막에서 말라죽을 뻔한 놈이 어째 지복의 표정을 짓고 허리에 엉겨붙어 있는 가심을 얼른 벗겨내 실어갔고, 긴장의 실이 끊어졌는지 흐늘흐늘 무너지는 록온을 여러 팔이 단단히 부축했다.
더위와 갈증과 피로로 눈앞이 빙빙 돌고 아카바고 나발이고 당장은 잠이나 늘어지게 자고 싶었지만, 그래도 록온은 인의 장벽을 헤치고 나타난 자그마한 실루엣을 향해 웃어주는 일만은 잊지 않았다.
"세츠나."
아이는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속으로 허걱하면서 잠자코 한 대 맞아줄 각오를 굳혔지만, 충격은 끝내 오지 않았다. 대신 록온은 품안에 뛰어들어 그를 미치광이처럼 끌어안은 소년의 가녀린 어깨를 하릴없이 쩔쩔매며 내려다보는 처지가 되었다.
"세, 세츠나……?"
"……다녀왔다고 해."
"예?"
"다녀왔다고 해!"
록온은 목에 필사적으로 매달린 아이의 작은 등을 쓸어안았다.
"다녀왔어, 세츠나."
"대체 뭘 하고 있나?"
본격적인 네푸드 원정에 앞서 느긋한 휴식으로는 마지막이 될 쿠르의 오아시스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결정 본 김에 풍요로운 야자수 그늘을 차지하고 앉아 의미도 없이 세기의 문학작품을 낳으려 낑낑대고 있던 록온은, 열 여섯답지 않게 낮고 허스키하며 그가 나고 자란 사막처럼 메마르고 건조한 목소리에 힉겁해서 고개를 반짝 들었고, 구깃구깃한 종이뭉치에 발을 파묻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록온을 째려보고 있는 작고 회초리처럼 호리호리한 검은 로브의 소년을 보았다. 오늘도 귀여웠으므로 록온의 입가는 절로 노골노골하게 풀어졌다.
……엉? 종이뭉치?
"─────────허걱."
반경 2미터를 깡그리 뒤덮은 종이뭉치의 산, 산, 산과 덤으로 엄청난 집념으로 죽어라 구긴 편지지를 서른세 번째로 투척하려 들어올린 제 팔을 뒤늦게 깨달은 록온의 뒤통수에 왕따시만한 식은땀이 대롱대롱 매달렸다. 기억이 전혀 없는데 설마 킹 크림슨의 농간인가!
스탠드를 찾으며 현실도피를 해봤자 뻘한 사태는 호전되지 않았으므로, 무표정하게 황당해 하는 고등기술을 구사하는 세츠나에게 록온은 머리를 긁적이며 헤실 웃어보였다.
"에─에에또, 러브레터?"
세츠나가 조인트를 깠다.
새벽 두 시에 정조를 위협당한 처녀 같은 비명이 진동했다.
당연했다. 벤케이도 싸쥐고 징징거린다는 자리다.
돌같이 단단하고 바위처럼 조용한 하리스의 사내들은, 물을 긷거나 낙타에게 물을 먹이거나 휴식을 취하거나 혹은 삼삼오오 모여서 빵을 씹는 등 내일의 원정을 바지런히 준비하던 손길을 잠시 멈추고 문제의 방향으로 일제히 눈과 귀를 모았다.
"지……지금 진짜……진짜 아팠……! 뭐, 뭐하는 거야 세츠나?! 불만이 있으면 우선 말로 합니다! 무조건 폭력에 호소하면 좋은 어른이 되지 못한다고 유치원에서 배우지 않았……아니다 여기 아랍이었지? 아무튼 폭력은 못 쓰고……이봐요 세츠나 군!? 일단 사람 말부터 좀 듣……어, 그거 내 만년필, 히에에에에에엑!? 우왓 안됩니다 오아시스는 모두의 것입니다! 쓰레기 투하는 안됩……아니아니 쓰레기가 아니지만? 야 어디 가! 만년필 돌려줘! 나도 선물받은 거란 말야, 만년필이 맘에 들면 내가 나중에 하나 사줄……세츠나! 세츠나 군! 세츠나 씨! 세츠나 소란 이븐 엘 이브라힘─────!!!"
한 마리 살쾡이처럼 능숙하고 유연하게 도망다니는 그들의 셰리프와 필사적으로 뒤를 쫓는 영국 미인, 이 아니라 영국군 중위를 한동안 진지하게 주시한 후, 하리스의 장정들은 서로간에 눈짓을 교환했다.
"저건……."
"음."
"즉……."
"역시."
"과연."
"드디어."
"언제?"
"곧."
"글쎄……."
"아니라고?"
"아무래도."
"어째서?"
"아직은."
"하지만……."
"그렇게?"
"틀림없어."
"그렇다면."
"우리가."
"음."
"응당."
"반드시."
"어떻게든."
사막의 사나이들은 과묵하다.
록온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러고도 족히 30분은 더 난리부르스를 추고,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소중하고 귀하고 이쁘고 기타 등등한 동생에게 쓰는 편지라 해명하고 나서야 가까스로 만년필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아랍인도 아니며 보통은 산처럼 움직이지 않는 게 임무인 저격수 주제에 노구를 이끌고3) 뙤약볕 아래를 선불맞은 망아지같이 이리 뛰고 저리 뛴 대가로 그날 밤은 쑤시는 근육과 아픈 허리와 쪼개지는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 앓아야 했지만, 어쩐지 조금 실쭉한 세츠나가 겁나게 귀여웠으므로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아졌다.
그나저나 밤새 내내 뭔놈의 수상쩍은 헐떡거림이 그리 많이 들렸는지 모르겠다.
"저기가 네푸드다."
세츠나는 언덕 아래, 끝없이 뻗어 있는 철도의 건너편, 광막한 땅을 가리켰다.
"여기서부터는 반대편에 닿을 때까지는 우리가 싣고 가는 물만으로 버텨야 한다. 낙타들에게 먹일 물은 없어. 스무 날이 지나면 약한 놈부터 쓰러지기 시작하겠지. 아무리 강인한 낙타도 삼십 일 이상은 버티지 못해. ──낙타가 죽으면, 우리도 죽는다."
세츠나의 어조는 늘 그렇듯 담담했으나, 밑바닥에는 예민한 사람이나 간신히 눈치챌 희미한 긴장이 도사리고 있었다. 사막에서 태어나 사막과 함께 살고 사막에서 죽는 베두인조차 감히 범접하지 못하는, 신에게 버림받은 가혹한 대지. 지금 이 아이는 그 땅에, 천혜의 요새에 도전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혼자가 아닌, 소년을 신뢰하고 따라온 쉰 명의 목숨과 함께.
가녀리기만 한 열 여섯의 어깨에게는, 그 무게가 아직은 조금쯤 버거우리라.
"그럼."
록온은 씨익 웃었다.
"여기서 미적거릴 틈은 없겠네. 뭐해? 어서 안 가고."
세츠나는 곁눈질로 록온을 흘겨보고 보란 듯이 한숨을 픽 쉬었다.
"머리통이 홀가분해서 좋기도 하겠군."
"뭐, 머리통이 홀가분……?! 야이 애 녀석 말빨하곤……! 이 형님 진짜로 웁니다. 울 겁니다! 내가 태평한 건 다 정당한 이유에서라구!"
"하아?"
"그치만, 세츠나 소란 이븐 엘 이브라힘이 여기 있잖아."
뭐가 그리도 희한했는지 커다란 적갈색 눈동자를 더욱 커다랗게 뜨고 이쪽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아이는 욕나오도록 사랑스러웠으므로, 록온은 기꺼이 충동에 백기를 들고 소년을 덥석 끌어안아 머리를 쓰담쓰담했다.
"어이어이 욘석아, 표정이 그게 뭐야. 왜, 형아 마음에 감동했쪄요~? 괜찮아 괜찮아, 세츠나는 잘할 수 있어. 두고 봐. 틀림없이 스무 날 후엔 건너편에서 역사를 새로 쓰고 있을 거라니까?"
잠시간 거침없는 손길에 머리를 내맡기고 벙쪄 있던 아이는 그러나 곧, 짜증 만땅으로 록온의 손을 뿌리치곤 대놓고 부비적대는 통에 보기 좋게 비뚤어진 두건을 고쳐 매었다.
"물론 문제없다. 내가 건담이다."
"오 바로 그거야 그……으잉? 건담?"
"출발!"
소년을 선두로 사내 쉰 명과 낙타 일흔 마리는 언덕을 달려내려갔다.
건담인지 간담인지 건덤인지가 대체 뭐에 쓰이는 물건인지 물어볼 여유도 없이.
네푸드 사막에 발을 들인 이후로는 햇볕이 너무나 강렬하고 후끈후끈한 열기가 극도에 달해 도저히 행군이 불가능한 대낮의 두세 시간을 틈타 눈을 붙이는 것을 제외하면, 낮에는 쉬임없이 달리고 밤에도 살을 에일 듯한 추위를 불사하고 오로지 희미한 별빛과 감에 의지하여 화산지대건 능선지대건 협곡이건 가리지 않고 뚫고 가는 초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웬만한 정신력 가지고는 하루도 버티지 못할 짓을 최소한 스무 날. 상상만 해도 진저리가 처질 일이었지만 록온은 마음 하나는 지극히 편안했다. 이럴 때는 무조건 지극히 편안한 것이 최선이었다.
훈훈한 일도 많았고.
<Scene 24>
세츠나는 작다. 작심하고 덤벼들면 반짝 안아올릴 수 있을 만큼 작았다.
하도 애가 작고 가냘프길래 불문곡직하고 재어봤더니 애초에 가늠했던 대로 5피트 4인치에 113파운드였다. 분개한 아이에게 있는 힘을 다해 짓밟힌 발등을 문지르면서 록온은 제 눈썰미를 자화자찬했다.
발등을 호되게 찍고도 성이 안 차 이어서 손목을 틀어쥐고 발을 걷어차 거의 10인치는 더 큰 록온을 단번에 엎어뜨렸으니 (엎고는 대뜸 올라타서 콧등까지 물어뜯었다. 넌 야수냐!) 좀 작다고 싸우는데 지장이 있지도 않고 하리스는 그들의 나어린 셰리프를 마치 영웅처럼 열광적으로 숭배하고 있고 무엇보다 귀여우면 장땡이라지만, 한 입에 삼키기엔 양고기 덩어리가 너무 컸고 그 자리에 하임리히법을 아는 자가 하나도 없어 불운하게 세상을 등진 숙부에게서 메디나 전투 직후 날치기로 셰리프 자리를 물려받은 일은 세츠나 개인에게는 다소간 불행이었다.
족장의 로브가 맞질 않았던 것이다.
자애로운 주름에 지혜와 경험과 니나노 정신이 세월 따라 쌓인 셰리프 나시르가 록온에게 귀엣말로 알려준 바에 의하면, 옷을 줄이겠답시고 덤벙대는 부족민들을 세츠나는 처음에는 침묵으로 인내하고 나중에는 죄 주먹으로 입 닥치게 한 후 그 이상의 반론을 봉쇄하는 짧고도 확고한 선언으로 모두를 감동의 물결로 휩쓸어버렸다고 했다. <키는 자란다>.
배를 쥐고 조용히 뒹군 뒤 일을 무사히 마치고 카이로로 돌아가면 우유도 잊지 말고 공수하자 결심한 록온이 마음속 메모에 중요 사항으로 기입하건 말건, 세츠나는 대략 두 사이즈 큰 옷을 오기인지 뭔지로 무심한 듯 쉬크하게 감내하고 있었지만 허리는 어떻게 졸라맬 수 있어도 소매는 그리 안되는 게 비정한 현실이었다.
하루에도 수천 번씩 묵묵하게 흘러내리는 소매를 접고 걷기를 되풀이하는 세츠나를 곁눈질하며 숫자를 헤아리다 여덟 살 더 먹은 나이도 속절없이 먼저 끈기가 닳아버린 록온은, 결국 휴식 시간을 틈타 짐을 바닥까지 뒤져 분명히 넣어온 문제의 물건을 찾아냈다.
"어이 세츠나, 이리 좀 와 봐라. ……얌마! 왜 경계하고 그래!"
고양이처럼 털을 빳빳이 세우고 엄청난 스피드의 백스텝으로 우선 내빼고 보려는 아이를 붙잡고 늘어지고, 괘씸죄로 헤드락을 한 번 걸어주고, 대가로 아킬레스건을 걷어채이고, 아웅다웅 엎치락뒤치락 실랑이 끝에 절대적인 키와 체중의 차이를 십분 활용해 우격다짐으로 아이를 뒤에서 포옥 껴안고 냅다 앉아버리기까지 딱 15분이 걸렸다. 형, 미성년자 성희롱은 범죄거든. 상냥하게 웃으며 엄지를 밑으로 꼴아박아 줄 라일은 슬프게도 카이로에 있었다. 왠지 급속도로 치밀어오르는 살의에 몸을 떨며 한손으로 약병을 뽀개어 새로 입원한 어느 고위 장성의 맥빠진 심장이 그나마 하던 업무마저 포기할 뻔했지만 어디까지나 여담이고, 카이로의 사정을 알 리 없는 형님은 온몸으로 짜증을 팍팍 뿌리면서도 체념했는지 일단은 얌전히 안겨 있는 세츠나의 팔을 들어올리고 일행 전부가 흥미진진하게 주시하는 가운데 짐 밑바닥에서 뽑아온 새빨간 끈 두 줄을 잡고 작업을 개시했다.
"자, 어디 보자……이렇게 하고, 이렇게 묶고, 이렇게 돌리고, 이렇게 잡아서 이렇게 요렇게 저렇게……오케이, 다 됐다!"
1초에 매듭 열 개 짓는 번개같은 손놀림으로, 닐 L. 디란디가 어느 일요일 오후 의미도 없이 고안한 끔찍스럽게 복잡하고 소름끼치게 러블리하며 닭살 돋도록 큐트한 나비매듭을 지어 양쪽 소매를 고정한 록온은 성취감에 상큼하게 땀을 씻었다. 이젠 절대 흘러내릴 염려가 없다고 세츠나의 머리를 토닥여주고, 남은 시간 선잠이나마 자고자 몰래 뒤나메스라 이름지은 제 낙타에게로 발길을 돌렸으나, 라일의 머리에 문제의 매듭을 의기양양하게 선보였다 소금 넣은 팬케이크를 억지로 입에 쑤셔박는 고문은 둘째치고 닷새를 내리 무시당한 끝에 서러운 나머지 가족 영정을 껴안고 청승을 떨다 등짝만 조낸 밟힌 쓰라린 기억이 노도처럼 엄습하였으므로 눈물짓기에 바빠 뒤에서 말없이 흑화한 세츠나가 잠자코 엄지를 치켜올린 부하 여러분을 양손에 휘어잡은 시미타르 네 자루로 무자비하게 쳐날리는 광경은 미처 보지 못했다. 후드려패는 쪽도 후들겨맞는 쪽도 얼굴만은 무덤덤한 꼴이 구경하기에 약간 호러이긴 했다.
그리고, 세츠나가 매듭을 풀어보려 꼬박 세 시간을 낑낑댄 끝에 성과는커녕 잠잘 여가만 홀랑 까먹고 낙타에 도로 올라야 했고, 매듭을 가리키며 비웃, 아니 폭소, 아니 박장대소, 아니 인자하게 미소 짓는 셰리프 나시르의 턱수염을 홧김에 죄 뽑아버렸다는 것은, 록온만이 모르는 뒷이야기다.
<Scene 31>
"물 낭비다."
세츠나가 퉁명스레 내뱉었다.
팔뚝을 둥둥 걷어붙이고 셰이빙 크림을 얼굴에 한가득 쳐바른 채 가죽띠에 열심히 면도칼을 갈다가 록온은 어깨를 움츠렸다. 자기 관리 철저한 영국신사에게 물 한 방울이 아까운 사막이라 해서 아침 면도를 거르는 일 따위는 애초에 용납되지 않는 법이다.
"좀 봐주라. 나도 귀찮아 죽겠어."
"기르면 되잖나."
"어울릴 얼굴도 아니고요, 수염은 깎으라 있는 거라고 20년을 설교 듣고 살면 누구나 파블로프의 개가 됩니다. 아침에는 자동적으로 몸이 반응하는데 어째."
주기적으로 면도를 할 수밖에 없는 코카소이드 성인 남성의 숙명을 침울히 반추하다 록온이 중동은 풍성한 수염을 숭상하고 권장한다는 엄연한 사실과 덤으로 이웃집 김씨 아줌마급 눈칫빨까지 새까맣게 망각하고 한 말은 다음과 같았고,
"세츠나는 좋겠어─빰도 야들야들하고, 별로 수염 날 체질도 아닌 것 같던데. 앞으로 살기 얼마나 편하겠냐."
그 말이, 애라고 얕보이는 데 진력이 나 어떻게든 수염 좀 길러보려 기를 쓰다 나는 둥 마는 둥 듬성듬성 솟는 수염빨에 좌절하고 부족민 전체가 옷자락에 매달려 읍소, 호소, 애소하며 말리는지라 우울하게 칼을 들어야만 했던 세츠나의 뼈아픈 과거를 건드릴 줄은 차마 몰랐다.
강렬한 킥이 뒤통수에 작렬했고, 록온은 수염 아닌 코를 벨 뻔했다.
<Scene 46>
사막의 경치는 단조롭다.
너무나도 눈둘 데 없이 단조롭고 낙타의 움직임은 지독히도 리드미컬해, 올라탄 사람을 꿈의 나라 서쪽 나라로 보내기가 십상이었다. 사막에서 잔뼈가 굵은 베두인조차도 조금만 정신을 놓을라치면 꾸벅꾸벅 졸기가 다반사이니 말해 무엇하랴.
개중에는 등을 꼿꼿이 편 채로 걸지게 잘 자는 기술을 타고난 행운아도 가끔 있지만 대부분은 졸다 보면 이리 휘청 저리 휘청대다 십에 팔구 낙타에서 떨어지고, 낙타에서 떨어지는 것은 사막에서 바로 죽음으로 직결된다.
불상사를 막는 최선의 방법은 눈을 똑바로 뜨고 삶의 의미를 묵상하며 메디테이션으로 인내하는 것이었다. 이러니 사막을 건너다 대오각성한 수행자의 숫자는 헤아려봤자 귀찮기만 하고, 세계의 3대 종교 중 두 개가 사막에 근원을 두고 예언자들이 걸핏하면 오지에 틀어박힐 만도 했지만 록온 스트라토스와 철학은 별 인연이 없었다. 그리고 중증 브라콤의 동생아그리워보고싶다흑흑에도 한계는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정오 무렵에 이르러 앞으로 꾸벅 뒤로 꾸벅 꿈나라로 어기영차 노를 젓고 있는 록온을 무언으로 흘기고, 세츠나는 회초리를 들어 드러난 목덜미를 냅다 후려쳤다.
"익!"
"졸지 마라. 떨어지고 싶나."
부지불식간에 얻어맞은 자리를 감싸쥐고 고개를 박은 채 아파하는 록온에게 세츠나는 냉정히 핀잔을 주었다. 내심 새하얀 목덜미에 새겨진 빠알간 자국이 꽤 짜릿하다고 덤덤하게, 어디까지나 덤덤하게 곱씹으면서.
뭔가에 눈을 뜰 징조를 보이고 있는 세츠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나이 헛쳐먹은 어른은 우는 소리로 씨알도 안 먹힐 변명을 했다.
"……아, 안 잤어! 우주의 신비를 새삼 경이롭게 바라보고 있었다구! 인생 살기가 지긋지긋해질 때면, 브라운 부인, 세상 일이 제대로 풀리는 게 없고, 세상 사람들이 다 짜증나고 병신 같을 때, 이제 살 만큼 살았다고 느껴질 때면4),"
"침이나 닦고 우겨라."
"우에엥 우리 애가 너무 쉬크해요! 형은 울고 싶습니다!"
징징대는 시늉이나 하고 있는 한심한 어른한테 잔소리를 하기도 귀찮아져 대뜸 등짝을 발로 질러주자 쨍알거림이 뚝 멎었다. 폭력도 때로는 꽤 쓸만하다.
록온은 여지껏 따끔거리는 목덜미와 아픈 등짝을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다.
"미안해. 두 번 다시 안 그럴게."
그리고는 오른손을 들고 나름 진중하게 덧붙였다.
"서약. 내가 또 졸면 성을 갑니다. 록온 트로포스로."
20분 만에 깨졌다.
문제의 어른은 아예 가슴께에 코를 박고 쳐자고 있었고, 세츠나의 관자놀이에서는 런던에 비할 만한 복잡한 지형도가 불룩불룩 튀어올랐다.
맹세를 깨뜨리는 자에게는 응분의 처벌이 따라야 하는 법.
아이는 잠자코 '왜 그래야 하지?' 란 심오한 의문에 사로잡혀 있는 무하마드 엘 데일란을 손짓으로 불러 낙타의 고삐를 대뜸 떠넘겼다. 이어서 가뿐한 몸놀림으로 뒤나메스에 훌쩍 옮겨 탄 세츠나는, 등뒤에 적절히 자리를 잡은 후 부드러운 갈색 곱슬머리를 가볍게 헤치고는, 밑으로 드러난 하얀 귓불을,
물었다.
덥석.
"히, 히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새벽 세 시에 떼거리로 정조를 위협당한 처녀 같은 비명이 진동했다. 참고로 디란디 유전자는 대대로 귀가 약하다.
귀 안팎을 샅샅이 핥고 빠는 사이 비명은 어느 틈엔가 숨넘어가는 헐떡거림으로 바뀌었고, 울고 불며 반 헛소리같이 제발 그만하라는 애원이 중언부언 이어졌지만 세츠나는 가늘되 힘 있는 양팔로 미친 듯이 튀어오르는 어깨를 꽈악 내리누른 채 차분히 제 할 일만을 했다.
록온이 그예 뻗어버려 낙타에서 내리지 않는 한 더는 과업 수행이 힘들어지자, 세츠나는 미묘한 충만함과 한층 미묘한 아쉬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상반신을 일으켜 손을 털고 애락(愛駱) 엑시아의 등으로 귀환했다. 타액에 흠뻑 젖고 벌겋게 달아오른 귓전에, 졸고 싶으면 얼마든지 졸아도 좋다는 나지막한 협박을 남기기도 잊지 않았다.
숨소리 하나 나지 않는 고요함 속에 시종일관 다 지켜본 쉰 쌍의 손은 주저없이 엄지를 치켜세워 그들의 족장을 찬미했고, 록온은 죽고 싶은 심정으로 뒤나메스의 믿음직한 등에 널브러져 남자라서 자연히 따라온 생리 현상을 무슨 수로 무마해야 할지 훌쩍훌쩍 울며 고민에 빠졌다. 위에서 별 발광이 다 벌어져도 끝끝내 보조를 흩트리지 않은 뒤나메스의 우수함이 새삼 뼈에 사무쳤다.
그리고 록온은 그 후 단 한 번도 졸지 않았다. 몸으로 배울수록 학습이 빠른 법이다.
<Scene 55>
하리스의 여러분도 록온에게 친절했다. 실은 좀 부담스럽도록 친절했다.
순서를 정해놓고 돌아가면서 때 되면 텐트 쳐주고 빵 구워주고 물 따라주고 모래 털어주고 옷 개어주고 담요 덮어주고 짐 들어주고, 뭔가 이러려고 네푸드에 오진 않았을 텐데 이 강건한 사내들은 종자 노릇을 마다하기는커녕, 세츠나와 부대낀 덕에 차차 하리스의 복잡섬세한 내적 동향을 읽는 방법을 익힌 록온의 눈이 삐지 않았다면, 은근히 즐거워까지 하며 잡일을 떠맡고 있었다.
공짜로 쉰 명을 부려먹는 기분이 너무나도 찝찝해 친절은 고맙지만 혼자서 할 수 있다고 여러 번 거절해 보았으나, 하나같이 초지일관 무표정하게 고개만 끄덕끄덕하고 말 귀에 바람 불고 쇠귀에 염불한 듯 하던 일 그냥 재개하는 덴 뭐 방도가 없었다. 벽에 대고 악쓰는 심정이 이러리라.
급기야는 이 사람들이 대체 왜 이러나 싶어 살살 겁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어느 동화인가 비슷한 얘기가 있었던 것도 같다. 어 설마 튼실하게 살찌워서 구워먹고 튀겨먹고 비벼먹을 작정은 아니겠지요 아하하하하하하. ……난 늙은 고기라서 맛없어!!5)
록온의 의혹은 하리스치고는 그나마 안면 근육이 좀 움직이는 편인 가심이 맛있게 구워진 반죽의 검은 재를 정성껏 털어 정중히 내밀 무렵 절정에 달했다. 친절은 친절이고 털고도 재가 여전히 묻어 있었으므로 저격수의 생명인 손을 보호하려 사막에서도 근성으로 끼는 장갑을 벗고 감사히 받아들려 했을 때, 거칠고 가무잡잡한 손이 록온의 손을 와락 잡았다.
"……엉?"
굼실굼실.
굼실굼실.
굼실굼실굼실굼실.
마치 푸줏간의 고기를 가늠하듯 집요하고도 끈덕지게 손바닥의 근육을 하나하나 만지고 손가락을 확인하고 손목을 더듬고, 그러고도 한참을 더 잡고 있다가 아쉽게 손을 놓아주었다. 식은땀을 폭포수처럼 흘리면서 빠직빠직 굳어버린 록온에게 머리를 살짝 숙여보이고, 가심은 경쾌하게 폴짝거리며 눈을 하이에나 모양 빛내고 선 일행에게로 돌아갔다.
삼삼오오 무리지은 남자들에게서 하리스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판돈'이라느니 '운좋은 놈'이라느니 '나도 한 번만'이라느니 모옵시 불온한 단어들이 속닥속닥 새어나왔고, 록온은 마음속으로 God Save the Me를 끝도 없이 중얼거리며 이건 또 이거대로 의미를 알 수 없지만 귀여우니 만사 오케이인, 옹송그리고 옆에 바싹 붙어 앉은 세츠나에게 쭈뼛쭈뼛 말을 걸었다.
"저 말야, 세츠나……?"
아이는 고개를 외로 틀어 록온을 힐끗 보았다.
"문제없다. 내가 건담이다."
선문답의 모범적인 예시였다.
<Scene 68>
새까만 돌산이 별빛마저 흡수하여 앞도 변변히 보이지 않는 한밤중에 날카롭게 돌출한 절벽을 돌아 가파른 언덕을 오르느니 죽고 싶어 환장했으면 목을 매는 편이 차라리 손쉽고 빨랐으므로, 그날 밤은 야영을 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록온은 다리를 접고 얌전히 붙어 앉은 뒤나메스의 온기를 만끽하며 담요를 둘둘 말고 오랜만의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동생의 F컵 슴가가 가슴팍에 삶의 무게로 터억 얹혀 오는 개꿈을 꾸었다.
라일아 얘야 브래지어는 어쨌니……이 형아 노브라만은 용서 못합니다 그런 난잡한 애로 키운 기억은 없습니다 하다못해 가죽띠라도 두르려무나……야 벗긴 왜 벗어! 벗지 마 이놈아! 보지 마 이것들아! 펄펄팔팔 날뛰다 지 잠꼬대에 지가 화들짝 놀라 깨어보니 등골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고 뭔가 시커먼 것이 몸 위에 올라와 있었다.
도로 기절할 뻔했다.
제 팔이 문제의 물체에 치덕처덕 휘감겼음을 때맞춰 깨달은 덕분에 정신을 수습하고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정황을 파악할 여유를 얻었다. 품안에 쏘옥 갈무리된 자그마한 물체의 정체는,
"……얼레? 세츠나……?"
F컵 슴가 대신 세츠나의 머리가 흉곽을 인정사정없이 압박하는 이 상황이 무슨 조화인지 알 턱은 없었으나, 평소의 무감정한 얼굴을 살짝 풀고 록온에게 치댄 채 새근새근 자고 있는 아이는 돌아버리게 사랑스러웠다. 까짓 하룻밤 베개 노릇도 불사할 만큼은.
뒤편에서 엑시아와 뒤나메스도 사이좋게 몸을 붙이고 어우러진 가운데, 록온은 아이를 조심스럽게 도로 껴안고 다시금 잠에 빠져들었고, 이번에는 사벨타이거에게 쳐밟히는 꿈을 꾸었다.
귀여움은 세계를 구한다.
비록 그 표정이 포식자의 배부른 미소와 흡사하더라도.
열 아흐레째 되는 날, 새벽 다섯 시경, 물이 바닥을 보일 무렵, 일행은 최후의 난관인 <태양의 모루>를 돌파했다.
록온은 비로소 긴장을 풀고 어깨를 폈다.
"세츠나, 우물에는 언제쯤 도착하겠어?"
"이대로라면, 정오에는."
세츠나의 무뚝뚝한 목소리도 희미하게나마 들떠 있었다. 이제 하늘에서 불벼락이 떨어지지 않는 한 네푸드 원정은 성공으로 막을 내릴 것이었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고쳐 썼다는 실감은 누구에게나 가슴 벅찬 감동이다. 하물며 열 여섯 소년이라면, 더욱.
록온이 웃고 아이의 자그마한 머리통을 쓰다듬으려 손을 내밀었을 때, 한켠에서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자알이 무리에서 벗어나 어슬렁거리는 낙타를 발견한 것이다.
안장주머니와 소총, 식량은 멀쩡히 붙었지만, 정작 타고 있어야 할 가심은 없었다.
삽시간에 섬뜩한 떨림이 일행 전체를 덮쳤고, 셰리프 나시르는 욕설 섞인 탄식을 내뱉으며 낙타의 옆구리를 내리쳤으나, 세츠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낙타를 몰아 앞서나가는 아이에게, 록온은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따라붙었다.
"돌아가지 않을 거야, 세츠나?"
"어째서."
"가심이 뒤에 있어!"
"그래서, 마흔 아홉 명 전부를 죽일 셈인가."
세츠나의 어조는 여전히 퉁명스러웠지만, 록온은 돌아보려조차 하지 않는 가늘고 꼿꼿한 등을 설핏 스치고 지나간 경련을 똑똑하게 알아보고 말았다.
결심이 완전히 섰다.
록온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말했다.
"내가 갈게."
"──뭐?"
"셰리프는 더 많은 사람을 책임져야지. 하나쯤은 외부인한테 떠넘겨."
"미쳤나!"
록온은 더 이상의 언쟁을 포기하고 즉각 고삐를 잡아당겨 낙타의 머리를 뒤로 돌렸다. 낙타는 떼를 지어 사는 데 익숙하고 흔히 동료들을 떠나길 몹시 싫어하지만, 뒤나메스는 순순히 복종했다.
경악과 당황이 뒤섞인 웅성거림이 사방에서 일었다. 셰리프 나시르조차 침착성을 잃고 황급히 길을 가로막고 나섰다.
"태양의 모루로 돌아가다니, 자살 행위요! 죽으려고 작정했습니까!"
"셰리프 나시르, 비켜주세요."
"포기해요, 록온 스트라토스. 가심의 때가 온 거요!"
"때가 되어봐야지 압니다."
단호히 노인을 물리치고 뒤나메스에 박차를 가해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려다, 록온은 일순 멈칫하며 뒤를 보았다.
세츠나의 손이 팔을 움켜쥐고 있었다.
"록온 스트라토스!"
"세츠나, 아파."
"이러려고 우리를 여기까지 끌고 왔나!"
"세츠나."
소년의 강철 같은 손가락이 무작스럽게 피부에 파고들었다. 날선 손톱이 아팠지만, 록온은 어쩐지 멍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분노한 야수의 포효와도 같은 신음성을 토하는 이 아이는 무척이나 강하고도 애틋한 아이라고, 때에 맞지 않는 생각을 했다.
충동적으로 몸을 숙여 아이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눌러댔다.
숨을 삼키며 파르라니 굳은 세츠나를 부드러운 몸짓으로 밀어내고, 록온은 미소를 지었다.
"돌아올게."
세츠나는 두건을 잡아뜯어 바닥에 내팽개쳤다.
태양이 드디어 중천에 걸렸다.
록온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정면을 응시했다. 변화무쌍한 사막의 신기루가 시야를 어지럽혔다.
저 미친놈이 돌아올 때까지 나도 예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다고 땡깡을 부려대는 셰리프를 부하들이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겨우겨우 마이구아 우물로 모시고 갔지만, 고함지르고 악을 쓰기보다 더욱 무시무시한 침묵 속에서 신경질적으로 불씨만 쑤시고 있는 세츠나에게 감히 접근할 엄두는 하리스의 강건한 사내들도 차마 내지 못했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고, 다섯 시간이 흘렀다.
아직 경험이 부족한 몇몇이 정신적 압박을 못 이겨 나가떨어질 즈음, 세츠나는 막대기를 던지고 벌떡 일어났다. 수십의 시선이 그들의 셰리프를 따라 다 함께 한 방향으로 쏠렸다.
보초로 남겨놓고 온 다훔이 소리를 지르고 손을 흔들며 달려오고, 사람 둘을 실은 뒤나메스가 활발한 발걸음으로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환호성이 일대를 휩쓸었다. 사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리를 박차고 달려나갔다.
하리스 특유의 덤덤함도 잠시 잊고 열광적인 흥분에 사로잡힌 사내들에게 겹겹이 둘러싸여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게 되자, 영리한 뒤나메스는 맵시 있게 다리를 접고 주인을 내려놓았다. 일부는 사막에서 말라죽을 뻔한 놈이 어째 지복의 표정을 짓고 허리에 엉겨붙어 있는 가심을 얼른 벗겨내 실어갔고, 긴장의 실이 끊어졌는지 흐늘흐늘 무너지는 록온을 여러 팔이 단단히 부축했다.
더위와 갈증과 피로로 눈앞이 빙빙 돌고 아카바고 나발이고 당장은 잠이나 늘어지게 자고 싶었지만, 그래도 록온은 인의 장벽을 헤치고 나타난 자그마한 실루엣을 향해 웃어주는 일만은 잊지 않았다.
"세츠나."
아이는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속으로 허걱하면서 잠자코 한 대 맞아줄 각오를 굳혔지만, 충격은 끝내 오지 않았다. 대신 록온은 품안에 뛰어들어 그를 미치광이처럼 끌어안은 소년의 가녀린 어깨를 하릴없이 쩔쩔매며 내려다보는 처지가 되었다.
"세, 세츠나……?"
"……다녀왔다고 해."
"예?"
"다녀왔다고 해!"
록온은 목에 필사적으로 매달린 아이의 작은 등을 쓸어안았다.
"다녀왔어, 세츠나."
3"인간이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절정기는 열 여덟로, 그 다음은 계속 내리막길이다." ─아리에스의 시온
4실은 장기기증을 권장하는 노래이다.
5어떤 의미 그다지 빗나간 의혹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