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로 시국이 하 수상할수록 동인녀는 팬질로 세상에 항거하여야 하는 법이다. 궤변이라 하지 마~아라!
실은 토끼 님과 리린 님의 예물 교환식(...)에 자극을 좀 받았음. 그래요 동인질은 때와 장소를 못 가리니까 동인질이지. (야)
이걸 완성하지 못하면 이도 저도 안 될 것 같아 좀 필사적으로 매달렸더니 전개가 평소의 배로 파괴적이다. 니가 그러려니 해주세요 굽신굽신. 경고하는데 재미도 없습니다(...). 1편은 여기로.
2013년 5월 13일 추가. 내친 김에 2편까지 달렸습니다 야호호─이.
Chapter 1. 사막에서는 물 한 방울도 귀중한 보고
Chapter 2.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는 뻘소리는 작작하고 그냥 건너라
Chapter 3. 무모함이 도를 넘으면 귀신도 질린대더라
Chapter 4. 남자의 헌팅 대사는 예나 지금이나 발전이 없다
Chapter 5. 바보와 가위는 쓰기 나름
Chapter 6. 잠자는 공주는 원래 변태성욕자의 이야기라죠
Chapter 7. 애들은 모르는 사이에 알아서 자란다
Chapter 8. 참을성도 삼세 번까지
Chapter 9. 나쁜 일은 언제나 한꺼번에 터진다
Chapter 10.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데 정말이긴 한 거냐
Epilogue. 그리고,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다
Chapter 2.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는 뻘소리는 작작하고 그냥 건너라
1. 세츠나가 30초나 줄창 째려본 이유는 얼마나 제 취향인지 가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야)
세츠나의 취향 : 하얗고 뽀샤시하고 크고 예쁜 것. 예) 엑시아, 록온, 마리나 등등(...)
록온의 취향 : 작고 귀엽고 부비부비하기 좋은 것. 예) 하로, 세츠나, 티에리아, 펠트 등등(...)
티에링이 177이어도 록형보다는 아직 작지 말입니다 그리고 알렐이는 여기서도 은따지 말입니다(.......)
이 인간들 취향은 엑시아와 하로가 다 망쳤다. 그래 니네들 어떤 의미 하늘이 내려준 궁합 맞대니까? (가재눈)
2기에서 다스 쿠로디아가 제대로 염장만 질러주면 진짜 명예의 전당 올린다. 농담 아니다.
여담으로 알렐이의 취향은 잘빠지고 예쁘고 똑똑하고 나이 든 것. 예) 록온, 스메라기, (취지는 약간 어긋나지만) 할렐루야 등등(...)
(티에링은 취향이고 나발이고 베다 다음은 록형이 엄마 오리라;)
2. 우리의 사랑스런 빙구 해리 브라이턴 대령으론 콜라와 조슈아를 두고 박터지게 고민했지만 콜라는 마네킨 대령님 밑에서 꼬리 흔들며 학학대야 하지 말입니다.
그리고 콜라가 콜라 주제에 소위가 아니면 열받지 말입니다(...)
3. Voulez-vous coucher avec moi의 뜻은... 알아서 찾아보시길. (회피)
4. 아무래도 3편에서 알렐이 나오기는 그른 것 같다. orz
2013년 5월 13일 한 줄 더 추가. 그리고 정말로 3편에 나오지 못했다(.......)
"셰리프 세츠나 소란 이븐 엘 이브라힘?"
록온은 머릿속에 떠오른 첫 번째 문장은 '아, 역시' 였다. 가진 정보를 토대로 잘 곱씹어본 결과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곁에서 나란히 낙타를 몰던 영국군 파견 장교 조슈아 브라이턴 중령이 나름 멀끔하니 제비족 같은 얼굴에 의아한 빛을 띄웠다.
"그래, 이미 여덟 살에 집을 뛰쳐나가 도적떼와 어울리다 對 터키 게릴라로 전향해서, 얼마 전엔 메디나 전투에도 참전했던 이 바닥의 전설이지. 뭐야, 설마 몰라?"
"모를 리가요. 하도 어려 뵈길래 반신반의했죠."
"……목숨이 아까우면 본인 앞에서 그 말만은 말아라. 얼마 전에도 우리 쪽 녀석 하나가 거의 일곱 토막으로 썰렸다구."
무슨 수를 썼는지 반경 50마일 이내의 일은 완벽히 파악하고 있다는 파이살 왕자에게 대박 쪼여 뙤약볕 밑에서 몇 시간을 하릴없이 기다렸다는 사람치고 조슈아는 제법 살가웠다. 실은 바라그 계곡의 사방을 둘러싼 우람한 돌산에 이리 부딪히고 저리 반향하여 멀리까지 퍼져나가는 메아리에 넋을 홀라당 뺏긴 록온이, 남자는 몇 년을 잡숴도 마음만 소년인지라 마지막 남은 어른의 체면과 상식으로 주위를 새빨리 살핀 후 Twinkle, Twinkle Little Star를 비롯한 갖은 동요를 줄줄이 불러제끼고 그예 Lady Marmalade를 심지어 감정까지 그득히 실어가며 멋들어지게 뽑던 차에 양자의 시선이 떠억 마주쳤다는 뻘쭘한 과거를 브리티쉬의 미덕을 십분 발휘하여 우아하게 외면하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이었다.
가사는 하필 Voulez-vous coucher avec moi였고 본인은 음치였다.
"그보다 아까부터 신경쓰였는데, 그 민망한 가명 언제까지 울궈먹을래. 세상에 이름이 동사인 놈이 어딨냐고. 슬슬 본명 대지?"
"어 저기, 그게, 일단은 S레벨의 수비의무가 있어서요……."
"……임마, 가명보다 본명이 더 민망해서 정 말하기 싫음 그렇다고 솔직히 불어라. 무슨 S레벨 핑계야 핑계는."
록온은 머리를 긁적이며 실없이 웃었다. 실없이 웃을 수밖에 없기도 했다. 사실이었으니까.
머레이 장군은 이 쌩쌩하게 뺀들뺀들하기 짝이 없는 중위가 코드네임 한 개에 안면 근육의 인간적 한계선을 광속으로 돌파하는 꼬라지를 진심으로 기꺼워했던 모양이었다. 특A급 작전 기밀과 동급의 딱지를 즉석에서 덜컥 붙여주고 쫓아낸 것을 보면.
고맙게도 조슈아는 더 물고 늘어질 생각은 없는 듯 화제를 바꾸었다.
"아랍국에서 파견됐냐?"
"뭐, 대충 그렇습니다."
"무슨 일로?"
"딱 꼬집어 말하기가 좀. 일단 명목은 상황 판단이지만요."
"쳇, 판단하고 자시고도 없이 척하면 척이지. 상황은 최악이야. 터키놈들은 그 치들을 메디나 코앞에서 아주 떡으로 만들어 버렸어. 지금도 밤이면 밤마다 한 다스씩 도망가고 있으니 와해는 시간 문제라구."
"하아."
"냉큼 옌보로 후퇴해야 보금이나마 제대로 받을 텐데 이건 뭐 말을 들어먹어야 말이지!"
"하아."
"충고 하나 해 줄까, 록온 스트라토스? 너도 어쨌든 영국 군인이면 캠프에 들어가서 입은 다물고 눈만 크게 떠.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마."
조슈아의 나머지 발언은 뭔가 G와 A로 시작하는 모종의 인물에 대한 욕설로 채워졌다.
한 귀로 흘렸다.
‡ ‡ ‡ ‡ ‡
"망측한 이름이군요."
벌떼처럼 몰려드는 청원자들을 품위 있게 격퇴 중이던 파이살 티에리아 이븐 후세인 왕자는 간결하고도 고상한 첫 인사를 마쳤다. 자이드의 소개장을 꼼꼼히 읽고, 두 번 더 읽고, 크와악하며 집기를 뒤집고 쿠션을 날리고 편지를 갈기갈기 찢은 후 죽어마땅을 연타하면서 발로 쾅쾅 짓밟은 다음이긴 했지만.
록온은 어깨를 푹 떨구었다. 록온 스트라토스라는 작명자의 정신머리와 취향이 심히 걱정되는 코드네임을 편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까지 무사태평한 O형의 신경으로도 나흘은 걸렸으니 다른 이들이야 알아볼조였으나, 아마도 다국적 혈통에서 유래했을, 프린스 아닌 프린세스래도 먹힐 완벽한 미모에게 대놓고 탄압당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타격이 좀 막심했다.
‡ ‡ ‡ ‡ ‡
셰리프 세츠나 소란 이븐 엘 이브라힘과 록온 스트라토스의 운명적이긴 한지 슬슬 의심스런 두 번째 만남은 파이살 왕자의 텐트에서 이루어졌다.
근엄한 얼굴의 노인이 코란을 낭송하는 도중 가타부타 말도 없이 텐트로 불쑥 들어온 세츠나에게 <강렬한 눈빛으로 30초간 줄창 째려보기>에 이어 역시 가타부타 말도 없이 핏대 올려가며 옌보로 후퇴하기를 주장하는 조슈아를 <발로 죽 밀어내고 옆자리로 마구 비집고 들어오기>, 마침내는 <무덤덤한 얼굴로 옹송그리고 꼭 붙어 앉기>를 연속으로 줄줄이 당한 록온은 아리송한 상황에 어찌 대처해야 할지 잠시 앞길이 막막했다. 당연하지만 육사에선 사춘기 청소년의 심리학은 교습하지 않는다. 그저 사절 된 도리로 뜬금없이 팔과 등 중간께에 치받쳐 오는 체온을 묵묵히 감내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절대로, 무식하게 큰 시미타르를 전부 풀어 한결 작고 여리기만 한 아이 특유의 따스한 온기가 고양이처럼 부비적부비적 다가드는 것에 곤혹스런 마음이 단박 흐늘흐늘 녹아내렸기 때문은 아니고 하물며 때도 장소도 못 가리는 맏이의 본능과 있을 턱이 없는 모성본능과 덤으로 라일이 짜증을 내며 스킨십을 거부하는 통에 최근 몇 년 쌓일 대로 쌓인 프러스트레이션이 이구동성으로 우와아 뭐냐 얘 귀엽잖아!! 를 울부짖었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글쎄 아니라면 아니다. 좀 믿어라.
‡ ‡ ‡ ‡ ‡
세츠나가 발로 밀어내건 심기 불편한 티가 줄줄 흐르는 왕자가 불온한 언사로 북북 긁어대건 눈물겹도록 한 목소리로 줄기차게 옌보 후퇴를 주장하던 조슈아가 왕자의 눈짓을 받은 세츠나에게 즉각 문자 그대로 달랑 들려나간 후, 파이살 왕자는 비로소 뻘하게 앉은 록온에게로 조각같이 아름다운 얼굴을 돌려 입을 열었다.
"그럼, 록온 스트라토스, 당신은 어찌 생각하는지 들어보고 싶습니다."
록온은 그를 응시하는 왕자를 차분히 가늠해 보았다. 어쨌든 주어진 임무는 인물 평가였다.
부친 사이드 이오리아 후세인 빈 알리는 사진과 초상화로밖에 본 일이 없었으나, 초점도 제대로 안 맞는 사진에서조차 쉽사리 알아볼 수 있는 가장 골치 아픈 종류의 인종이었다. 회의적인 이상주의자. 인간을 깊이 이해하므로 깊이 불신하는 옹고집쟁이 대머리 노인이었다.
부친과는 조금도 닮지 않은 파이살 왕자의 얼굴에 서린 아집과 오만만은 그럼에도 부친의 판박이였다. 한편 세츠나보다 더욱 짙은 붉은색을 띤 눈동자는 지적이고 영리했으며 한 번 정한 일은 반드시 이룩하고 말겠다는 고집센 불길로 활활 타고 있었다.
아직은 어리다. 경험도 부족할 터였고 중책을 걸머졌음에도 10대 티가 완연한 미처 다 못 자란 체구는 안쓰럽기까지 했다. 하물며 한 발만 잘못 디디면 즉각 독선이 일을 그르치고 말 타입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왕자는 칼을 든 예언자, 최전선의 지도자가 될 기질을 품고 있었다. 최소한 갤러터진 형들보다는 백만 배 나았다.
애초에 예감한 대로 파이살 왕자에게서 결실을 보았음을 속으로 만족스럽게 음미하며, 록온은 질문에 응했다.
"──옌보는 다마스쿠스에서 지나치게 멀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죠."
"다마스쿠스에 갔었습니까?"
"딱 한 번요. 그래도 아름다움을 알아보기에 부족한 시간은 아니었어요."
록온은 콧등을 긁적거리며 내친 김에 한 발 더 나갔다.
"솔직히 말씀드려, 왕자님도 짐작은 하고 계시겠지만, 옌보로 물러나면 아랍혁명군은 바로 영국군 휘하의 일개 부대로 편입될 겁니다. 그닥 추천하고 싶지 않네요."
"호오, 반역으로 간주된다 한들 변명할 건덕지도 없는 발언이군요. 당신도 사막에 환장한 유럽인의 목록에 올라 있는 족속입니까? 록온 스트라토스."
"사막과 모래라면 이젠 지긋지긋한데요……."
"그게 아니라면 인간에 대한 존중을 조국을 향한 충성심 위에 두는 소위 휴머니스트거나 구제불능의 바보 멍청이거나 둘 중 하나겠지요."
"보통 후자로 여겨지긴 합니다."
파이살 왕자의 최대한 말랑말랑하게 표현해서 어이없어 하는 시선을 넉살좋게 흘려넘기기란 그다지 어렵지만은 않았다. 형의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사랑을 받다 받다 지쳐 급기야는 흑화한 라일 덕분에 지난 이십 몇 년간 낯짝의 두께만 경이적으로 증가한 덕이었다. 이걸 진정 감사해야 할지 말지에 대해선 일찌감치 사고를 접고 뒷말을 이었다.
"영국에 해군이 있다면 아랍에는 베두인이 있잖습니까. 사막은 노가 필요 없는 바다고요. 영국인이 바다에서 그렇듯이 베두인은 사막에서 원하는 곳 어디로든 가고 원하는 곳 어디든지 두들길 수 있어요. 그게 아랍인이 늘 싸워왔던 방식이고 세상에 아랍인의 의지를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하는데요. 유럽의 화기가 우수하긴 하지만 꼭 거기 매달려야 할 이유도 없다 봅니다."
"늦게나마 선택지를 한 가지 추가해야겠습니다. 당신, 정론이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줄 빤히 알면서도 정론을 논하고 이상만 먹고 살 수 없는 줄 뼈저리게 이해하면서 이상을 추구하는 골때리는 부류로군요."
"……아니, 그렇게까지 거창한 건 아닌데요……."
"유감스럽게도 이상론은 어디까지나 이상론일 뿐이죠. 당장은 옌보로 후퇴하는 것 이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습니다. 방금 들려나간 얼간이는 수에즈 운하의 방비에 절치부심해야 할 영국으로선 아카바의 해상공격은 불가능하다는 말만을 되풀이하고 있어요. 더더욱 유감스럽게도 그 얼간이의 말은 진실입니다. 흥, 그놈의 그레이트 브리튼! 런던이 야만인들로 부글대는 촌구석이었을 때 코르도바에는 가로등이 2마일이나 늘어서 있었죠."
"아랍은 위대했어요."
"9세기 전엔 말입니다."
"지금도 충분히 위대합니다. 보일 기회가 없을 뿐이고요. 기회가 도래했다고는 생각지 않으십니까."
"아버님은 그래서 터키에 항거해 일어나셨죠. 내게는 셰리프로서의 자격도 없는 형이란 작자들을 대신해 아버님의 유지를 이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분은 돌아가셨고 나는 코르도바의 정원을 밟지 못한지 10년도 넘었어요. 이 말라비틀어진 땅에조차 욕심을 내고도 남을 영국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지 않으려면……."
3인치 가량 아래 자리잡은 파이살 왕자의 붉은 눈이 록온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우리 인간이 마련할 수 없는 게 필요합니다."
"즉?"
"기적이지요."
‡ ‡ ‡ ‡ ‡
그날 밤 록온은 캠프 근처의 모래 언덕이란 모래 언덕에 전부 발자국을 찍었다. 타개책은 서성이기 시작한지 30분 여만에 비교적 쉽게 나왔다. 상식적으로든 전략적으로든 전술적으로든 올인할 가치가 있는 방법은 어차피 하나밖에 없었다.
진짜 문제는 실행에 나서도 되는가였다. 애초의 임무는 사이드의 세 아들들의 <평가>. 아랍 측을 재편성하고 싶어하는 영국군의 의향을 슬쩍 귀뜸해주는 정도와는 명백히 차원이 다른 월권 행위다. 까닥했다간 바로 군법회의에 회부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조금 각도를 바꾸어 생각하면, 하고 많은 소식통 중에 ─ 영국에 오리엔트라면 껌벅 죽는 인간이 어디 한둘인가 말이다 ─ 하필 지옥의 마이페이스요 남말은 조낸 안 듣고 고집은 뭣같고 규율이란 규율은 대충 다 어겨본 닐 로렌스 디란디를 굳이 골라내어 파견한 것은 무언가 아무도 예상 못한 대형 사고를 쳐주기를 은근히 기대했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원래 상층부의 속내는 복잡미묘한 법이다.
꼬박 하룻밤을 언덕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불어닥치는 바람과 찍고 지우는 공방전을 벌인 끝에, 록온은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배째자고.
‡ ‡ ‡ ‡ ‡
"미쳤군."
세츠나의 감상은 한결 짧고 가차없었다. 록온은 이곳에 온 후 두 번째로 어깨를 떨구었다.
"혹시 요즘 셰리프의 필수과목엔 한두 마디로 상대 박살내기도 들어 있는 거야? 나만 몰랐어?"
"길고 장황히 말해주길 바라나."
"어이, 그게 아니라아……사람이 밤새도록 머리를 쥐어짠 결과를 일도양단하지 말라구! 슬퍼지잖아!"
세츠나는 파이살 왕자의 <최대한 잘 봐줘서 어이없어 하는 시선> 못잖은 눈길로 팔을 휘저으며 항의하는 록온을 쏘아보았다.
"육로로 아카바를 습격하려면 네푸드 사막을 통과해야 한다."
"응."
"네푸드는 건널 수 없어."
"아, 아, 이의 있어요? 다들 불가능하다며 미리 겁먹고 설레발치던 장소를 넘고 건넌 예는 역사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알프스 봐라 알프스. 벌써 네 번이나 군대한테 밟히지 않았어."
"고작 알프스와 비교하긴가."
"고작이라뇨, 알프스가 웁니다."
록온은 장막 너머의 아득한 지평선을 가리켰다.
"아카바는 바로 저기. 총구는 전부 바다를 향해 있고. 가서 접수하기만 하면 돼. 뭐가 문제야?"
"육지 쪽으로는 접근할 수 없으니 전부 바다를 향했을 수밖에."
"바로 그러니까 기습하기엔 최고란 거 아냐. 터키애들이 어디 꿈이나 꾸겠냐고. 천혜의 요새는 지리적 이점이 한 번 무너지면 걷잡을 수 없어. 네가 간다면 난 기꺼이 뒤만 졸졸 따라갈 테니까. 에 또, 일단 쉰 명쯤이면 될라나."
"불과 쉰 명으로 아카바를? 더더욱 미쳤군."
"아까부터 미쳤다 미쳤다 연발하지 마라. 슬슬 형님 눈물나려 합니다. 쉰 명이 네푸드 원정에 성공하면 다른 쉰 명이 자연 따라오게 되어 있어. 더구나 저쪽엔 북부 호웨이타트 족도 있잖아."
"호웨이타트?"
반문하는 세츠나의 얼굴이 자못 험악했다.
"호웨이타트는 제 몫 챙기기에만 급급한 족속이다."
"대신 싸움에는 일가견이 있는 친구들이고."
"일가견이 있건 없건 알 바 아니야. 심지어 지금의 족장 알렐루야 아우다 아부 타이는 정신마저 오락가락하기로 악명이 높아. 그런 자들과 손을 잡는 건 곧 죽어도 사양이다."
퉁명스레 내뱉고는 할 말은 다 끝났다는 듯 세츠나는 매정하게 등을 돌렸다. 예상은 했지만 아니나다를까 예상대로였으므로 록온은 그닥 당황하지 않고 곧장 플랜 B로 이행했다.
"기다려, 세츠나."
아이답게 커다란 적갈색 눈동자가 또 뭐냐는 현저한 짜증을 담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이 바닥의 전설이다 뭐다 해도 역시 열 여섯이다 싶어 록온은 내심 웃음을 삼켰다. 지저분한 어른은 뒤에서 애타게 부르건 말건 제 할 말 끝났으면 미련 없이 자리를 뜨는 법이었다. 적어도 록온 스트라토스는 그리 할 터였다.
그리고 지저분한 어른답게 그는 망설이지 않고 히든카드를 뽑아들었다.
"넌 나한테 빚이 있을 텐데."
"……무슨 빚."
"내 안내인을 죽였잖아."
세츠나의 눈썹이 희미하게 꿈틀거렸다.
"하지미는 그곳에서 물을 마실 수 없다. 그 자도 알고 있었어. 그걸──."
"응, 하지만 덕택에 난 사막에서 미아가 될 뻔했다구."
우수하고 유능한 하로 컴퍼스가 제 구실을 해서 별 고생 안 했지만. 뒷말은 입속으로만 덧붙였다. 설득의 법칙 제 7조, 사실을 말하되 다는 말하지 말라.
무표정한 얼굴이 안면 근육 하나 움찔하지 않은 채 '직살나게 (삐──)한 놈' 색으로 물드는 것에 결코 개의치 않고, 록온은 효과 발군의, 한편으로는 업이 쌓여 훗날 등짝에 칼침 맞아도 항의 못할 낯짝이라 동생에게 가열찬 성토를 당하는 상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정확히는 '그러고 아무한테나 방긋방긋 웃어주고 다니다 열정을 주체 못한 변태들한테 돌림X 당했다고 새벽 세 시에 울면서 전화로 보고하진 말아줘. 내가 곤란해' 였다. 형을 사랑하지 않는 거냐!?)
그리고는 결정타를 날렸다.
"아랍 사나이라면, 한 일에는 책임을 져야지?"
‡ ‡ ‡ ‡ ‡
"쉰 명을 데리고 어디를 갈 작정입니까?"
하리스 부족의 굳건한 사내들이 낙타 사이를 누비며 원정 준비에 골몰하는 동안, 새벽의 어스름 속에서 수행원을 동행한 파이살 왕자의 하얀 실루엣을 재깍 알아본 록온은 배시시 웃었다.
"기적을 만들러요, 왕자님."
"큰일을 하기에 앞서 신성모독은 좋은 징조가 못 됩니다. 삼가십시오."
짐짓 매섭게 면박을 준 파이살 왕자는 즉시 말문을 돌렸다.
"중령은 달콤한 꿈길을 헤매고 있더군요. 나는 물론 상관에게도 한 마디 없이 일을 진행하다니 이런 막나가는 독단깽판은 난생 처음 보겠습니다. 후에 군법회의에 회부되어도 난 모릅니다."
"계급은 위지만 직속 상관은 아니라는 핑계로 어떻게든 넘겨보려고요. 왕자님은 어찌 아셨습니까?"
"다 아는 수가 있습니다."
"세츠나겠죠?"
왕자는 단지 우아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이리 된 일이니 메카의 파이살 티에리아 이븐 후세인의 이름으로 아카바에 입성하는 걸 허용해 주시겠는지."
"거절하면 순순히 따를 의향이 있긴 있습니까."
"에~또, 좀 많이 곤란하니까 그냥 허락해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대면한 이후 처음으로 파이살 왕자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스름이 채 걷히지 않은 시각이었지만 록온은 확신할 수 있었다. 눈이 좋지 않으면 저격수는 해먹지 못한다. 물론 그 와중에도 대인배스럽게 오, 제대로 웃으면 더 귀엽겠구먼, 이란 생각도 빼먹지 않았고.
"조건이 있습니다."
"네."
"티에리아."
"에?"
"왕자님이고 뭐고, 앞으로는 티에리아로만 부르십시오."
"에엣?"
"경어도 집어치워요."
"에에에엣!!"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게 꼬박꼬박 경어를 쓰는 당신을 보노라면 지네 백 마리가 살갗 위를 슬슬 기어다니는 느낌이 들어요. 생리적으로 매우 불쾌합니다."
"……우와 넘해."
그래도 역시 왕자님한테 반말은 좀, 어쩌고 꿍얼대며 슬슬 낙타에 오를 채비를 하는 록온에게 파이살 왕자, 아니 본인의 요구에 따라 티에리아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이마에 손을 가져갔다.
"우리의 신 베다의 가호가 있기를."
반사적으로 답례 인사를 한 후에야 한 박자 늦게 얼레, 알라 아니었나? 란 고민에 일순간 사로잡힌 록온의 어깨에 희고 고운 섬섬옥수가 턱 얹혔다. 다음의 돌발 상황에 미처 제때 대응하지 못한 것은 인간으로서는 당연한 일이라고 믿고 싶다.
입술에 따스하고 보들보들한 무언가가 꽤 오래 맞닿았다 떨어졌다.
쩌저적 금이 간 록온을 향해 티에리아는, 시종들에 의하면 그들도 십(삐─) 년 본 역사가 없다는, 참으로 상쾌하기 그지없는 백만 불짜리 썩소를 날렸다.
"아랍은 미인을 찬미합니다. 하렘의 자리는 언제든지 비워놓지요."
"저기, 왕자님……!? 왠지 그저께도 비슷한 말을 들은 것 같은……!? 아니, 왕자님한테만은 그 말 듣기가……아니, 그보다 하렘이라니!? 자, 잠깐 잠깐! 어째서 승리에 찬 염화미소를 은은히 띤 채로 가 버리는 건데!? 대답! 대답은 하고 가! 티에리아! 티에리아!? 티에리아───────!!!!!"
이리하여 록온 스트라토스는 對 파이살 티에리아 이븐 후세인 왕자의 애칭 이벤트를 무사히 수료하였다.
록온은 머릿속에 떠오른 첫 번째 문장은 '아, 역시' 였다. 가진 정보를 토대로 잘 곱씹어본 결과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곁에서 나란히 낙타를 몰던 영국군 파견 장교 조슈아 브라이턴 중령이 나름 멀끔하니 제비족 같은 얼굴에 의아한 빛을 띄웠다.
"그래, 이미 여덟 살에 집을 뛰쳐나가 도적떼와 어울리다 對 터키 게릴라로 전향해서, 얼마 전엔 메디나 전투에도 참전했던 이 바닥의 전설이지. 뭐야, 설마 몰라?"
"모를 리가요. 하도 어려 뵈길래 반신반의했죠."
"……목숨이 아까우면 본인 앞에서 그 말만은 말아라. 얼마 전에도 우리 쪽 녀석 하나가 거의 일곱 토막으로 썰렸다구."
무슨 수를 썼는지 반경 50마일 이내의 일은 완벽히 파악하고 있다는 파이살 왕자에게 대박 쪼여 뙤약볕 밑에서 몇 시간을 하릴없이 기다렸다는 사람치고 조슈아는 제법 살가웠다. 실은 바라그 계곡의 사방을 둘러싼 우람한 돌산에 이리 부딪히고 저리 반향하여 멀리까지 퍼져나가는 메아리에 넋을 홀라당 뺏긴 록온이, 남자는 몇 년을 잡숴도 마음만 소년인지라 마지막 남은 어른의 체면과 상식으로 주위를 새빨리 살핀 후 Twinkle, Twinkle Little Star를 비롯한 갖은 동요를 줄줄이 불러제끼고 그예 Lady Marmalade를 심지어 감정까지 그득히 실어가며 멋들어지게 뽑던 차에 양자의 시선이 떠억 마주쳤다는 뻘쭘한 과거를 브리티쉬의 미덕을 십분 발휘하여 우아하게 외면하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이었다.
가사는 하필 Voulez-vous coucher avec moi였고 본인은 음치였다.
"그보다 아까부터 신경쓰였는데, 그 민망한 가명 언제까지 울궈먹을래. 세상에 이름이 동사인 놈이 어딨냐고. 슬슬 본명 대지?"
"어 저기, 그게, 일단은 S레벨의 수비의무가 있어서요……."
"……임마, 가명보다 본명이 더 민망해서 정 말하기 싫음 그렇다고 솔직히 불어라. 무슨 S레벨 핑계야 핑계는."
록온은 머리를 긁적이며 실없이 웃었다. 실없이 웃을 수밖에 없기도 했다. 사실이었으니까.
머레이 장군은 이 쌩쌩하게 뺀들뺀들하기 짝이 없는 중위가 코드네임 한 개에 안면 근육의 인간적 한계선을 광속으로 돌파하는 꼬라지를 진심으로 기꺼워했던 모양이었다. 특A급 작전 기밀과 동급의 딱지를 즉석에서 덜컥 붙여주고 쫓아낸 것을 보면.
고맙게도 조슈아는 더 물고 늘어질 생각은 없는 듯 화제를 바꾸었다.
"아랍국에서 파견됐냐?"
"뭐, 대충 그렇습니다."
"무슨 일로?"
"딱 꼬집어 말하기가 좀. 일단 명목은 상황 판단이지만요."
"쳇, 판단하고 자시고도 없이 척하면 척이지. 상황은 최악이야. 터키놈들은 그 치들을 메디나 코앞에서 아주 떡으로 만들어 버렸어. 지금도 밤이면 밤마다 한 다스씩 도망가고 있으니 와해는 시간 문제라구."
"하아."
"냉큼 옌보로 후퇴해야 보금이나마 제대로 받을 텐데 이건 뭐 말을 들어먹어야 말이지!"
"하아."
"충고 하나 해 줄까, 록온 스트라토스? 너도 어쨌든 영국 군인이면 캠프에 들어가서 입은 다물고 눈만 크게 떠.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마."
조슈아의 나머지 발언은 뭔가 G와 A로 시작하는 모종의 인물에 대한 욕설로 채워졌다.
한 귀로 흘렸다.
"망측한 이름이군요."
벌떼처럼 몰려드는 청원자들을 품위 있게 격퇴 중이던 파이살 티에리아 이븐 후세인 왕자는 간결하고도 고상한 첫 인사를 마쳤다. 자이드의 소개장을 꼼꼼히 읽고, 두 번 더 읽고, 크와악하며 집기를 뒤집고 쿠션을 날리고 편지를 갈기갈기 찢은 후 죽어마땅을 연타하면서 발로 쾅쾅 짓밟은 다음이긴 했지만.
록온은 어깨를 푹 떨구었다. 록온 스트라토스라는 작명자의 정신머리와 취향이 심히 걱정되는 코드네임을 편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까지 무사태평한 O형의 신경으로도 나흘은 걸렸으니 다른 이들이야 알아볼조였으나, 아마도 다국적 혈통에서 유래했을, 프린스 아닌 프린세스래도 먹힐 완벽한 미모에게 대놓고 탄압당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타격이 좀 막심했다.
셰리프 세츠나 소란 이븐 엘 이브라힘과 록온 스트라토스의 운명적이긴 한지 슬슬 의심스런 두 번째 만남은 파이살 왕자의 텐트에서 이루어졌다.
근엄한 얼굴의 노인이 코란을 낭송하는 도중 가타부타 말도 없이 텐트로 불쑥 들어온 세츠나에게 <강렬한 눈빛으로 30초간 줄창 째려보기>에 이어 역시 가타부타 말도 없이 핏대 올려가며 옌보로 후퇴하기를 주장하는 조슈아를 <발로 죽 밀어내고 옆자리로 마구 비집고 들어오기>, 마침내는 <무덤덤한 얼굴로 옹송그리고 꼭 붙어 앉기>를 연속으로 줄줄이 당한 록온은 아리송한 상황에 어찌 대처해야 할지 잠시 앞길이 막막했다. 당연하지만 육사에선 사춘기 청소년의 심리학은 교습하지 않는다. 그저 사절 된 도리로 뜬금없이 팔과 등 중간께에 치받쳐 오는 체온을 묵묵히 감내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절대로, 무식하게 큰 시미타르를 전부 풀어 한결 작고 여리기만 한 아이 특유의 따스한 온기가 고양이처럼 부비적부비적 다가드는 것에 곤혹스런 마음이 단박 흐늘흐늘 녹아내렸기 때문은 아니고 하물며 때도 장소도 못 가리는 맏이의 본능과 있을 턱이 없는 모성본능과 덤으로 라일이 짜증을 내며 스킨십을 거부하는 통에 최근 몇 년 쌓일 대로 쌓인 프러스트레이션이 이구동성으로 우와아 뭐냐 얘 귀엽잖아!! 를 울부짖었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글쎄 아니라면 아니다. 좀 믿어라.
세츠나가 발로 밀어내건 심기 불편한 티가 줄줄 흐르는 왕자가 불온한 언사로 북북 긁어대건 눈물겹도록 한 목소리로 줄기차게 옌보 후퇴를 주장하던 조슈아가 왕자의 눈짓을 받은 세츠나에게 즉각 문자 그대로 달랑 들려나간 후, 파이살 왕자는 비로소 뻘하게 앉은 록온에게로 조각같이 아름다운 얼굴을 돌려 입을 열었다.
"그럼, 록온 스트라토스, 당신은 어찌 생각하는지 들어보고 싶습니다."
록온은 그를 응시하는 왕자를 차분히 가늠해 보았다. 어쨌든 주어진 임무는 인물 평가였다.
부친 사이드 이오리아 후세인 빈 알리는 사진과 초상화로밖에 본 일이 없었으나, 초점도 제대로 안 맞는 사진에서조차 쉽사리 알아볼 수 있는 가장 골치 아픈 종류의 인종이었다. 회의적인 이상주의자. 인간을 깊이 이해하므로 깊이 불신하는 옹고집쟁이 대머리 노인이었다.
부친과는 조금도 닮지 않은 파이살 왕자의 얼굴에 서린 아집과 오만만은 그럼에도 부친의 판박이였다. 한편 세츠나보다 더욱 짙은 붉은색을 띤 눈동자는 지적이고 영리했으며 한 번 정한 일은 반드시 이룩하고 말겠다는 고집센 불길로 활활 타고 있었다.
아직은 어리다. 경험도 부족할 터였고 중책을 걸머졌음에도 10대 티가 완연한 미처 다 못 자란 체구는 안쓰럽기까지 했다. 하물며 한 발만 잘못 디디면 즉각 독선이 일을 그르치고 말 타입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왕자는 칼을 든 예언자, 최전선의 지도자가 될 기질을 품고 있었다. 최소한 갤러터진 형들보다는 백만 배 나았다.
애초에 예감한 대로 파이살 왕자에게서 결실을 보았음을 속으로 만족스럽게 음미하며, 록온은 질문에 응했다.
"──옌보는 다마스쿠스에서 지나치게 멀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죠."
"다마스쿠스에 갔었습니까?"
"딱 한 번요. 그래도 아름다움을 알아보기에 부족한 시간은 아니었어요."
록온은 콧등을 긁적거리며 내친 김에 한 발 더 나갔다.
"솔직히 말씀드려, 왕자님도 짐작은 하고 계시겠지만, 옌보로 물러나면 아랍혁명군은 바로 영국군 휘하의 일개 부대로 편입될 겁니다. 그닥 추천하고 싶지 않네요."
"호오, 반역으로 간주된다 한들 변명할 건덕지도 없는 발언이군요. 당신도 사막에 환장한 유럽인의 목록에 올라 있는 족속입니까? 록온 스트라토스."
"사막과 모래라면 이젠 지긋지긋한데요……."
"그게 아니라면 인간에 대한 존중을 조국을 향한 충성심 위에 두는 소위 휴머니스트거나 구제불능의 바보 멍청이거나 둘 중 하나겠지요."
"보통 후자로 여겨지긴 합니다."
파이살 왕자의 최대한 말랑말랑하게 표현해서 어이없어 하는 시선을 넉살좋게 흘려넘기기란 그다지 어렵지만은 않았다. 형의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사랑을 받다 받다 지쳐 급기야는 흑화한 라일 덕분에 지난 이십 몇 년간 낯짝의 두께만 경이적으로 증가한 덕이었다. 이걸 진정 감사해야 할지 말지에 대해선 일찌감치 사고를 접고 뒷말을 이었다.
"영국에 해군이 있다면 아랍에는 베두인이 있잖습니까. 사막은 노가 필요 없는 바다고요. 영국인이 바다에서 그렇듯이 베두인은 사막에서 원하는 곳 어디로든 가고 원하는 곳 어디든지 두들길 수 있어요. 그게 아랍인이 늘 싸워왔던 방식이고 세상에 아랍인의 의지를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하는데요. 유럽의 화기가 우수하긴 하지만 꼭 거기 매달려야 할 이유도 없다 봅니다."
"늦게나마 선택지를 한 가지 추가해야겠습니다. 당신, 정론이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줄 빤히 알면서도 정론을 논하고 이상만 먹고 살 수 없는 줄 뼈저리게 이해하면서 이상을 추구하는 골때리는 부류로군요."
"……아니, 그렇게까지 거창한 건 아닌데요……."
"유감스럽게도 이상론은 어디까지나 이상론일 뿐이죠. 당장은 옌보로 후퇴하는 것 이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습니다. 방금 들려나간 얼간이는 수에즈 운하의 방비에 절치부심해야 할 영국으로선 아카바의 해상공격은 불가능하다는 말만을 되풀이하고 있어요. 더더욱 유감스럽게도 그 얼간이의 말은 진실입니다. 흥, 그놈의 그레이트 브리튼! 런던이 야만인들로 부글대는 촌구석이었을 때 코르도바에는 가로등이 2마일이나 늘어서 있었죠."
"아랍은 위대했어요."
"9세기 전엔 말입니다."
"지금도 충분히 위대합니다. 보일 기회가 없을 뿐이고요. 기회가 도래했다고는 생각지 않으십니까."
"아버님은 그래서 터키에 항거해 일어나셨죠. 내게는 셰리프로서의 자격도 없는 형이란 작자들을 대신해 아버님의 유지를 이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분은 돌아가셨고 나는 코르도바의 정원을 밟지 못한지 10년도 넘었어요. 이 말라비틀어진 땅에조차 욕심을 내고도 남을 영국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지 않으려면……."
3인치 가량 아래 자리잡은 파이살 왕자의 붉은 눈이 록온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우리 인간이 마련할 수 없는 게 필요합니다."
"즉?"
"기적이지요."
그날 밤 록온은 캠프 근처의 모래 언덕이란 모래 언덕에 전부 발자국을 찍었다. 타개책은 서성이기 시작한지 30분 여만에 비교적 쉽게 나왔다. 상식적으로든 전략적으로든 전술적으로든 올인할 가치가 있는 방법은 어차피 하나밖에 없었다.
진짜 문제는 실행에 나서도 되는가였다. 애초의 임무는 사이드의 세 아들들의 <평가>. 아랍 측을 재편성하고 싶어하는 영국군의 의향을 슬쩍 귀뜸해주는 정도와는 명백히 차원이 다른 월권 행위다. 까닥했다간 바로 군법회의에 회부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조금 각도를 바꾸어 생각하면, 하고 많은 소식통 중에 ─ 영국에 오리엔트라면 껌벅 죽는 인간이 어디 한둘인가 말이다 ─ 하필 지옥의 마이페이스요 남말은 조낸 안 듣고 고집은 뭣같고 규율이란 규율은 대충 다 어겨본 닐 로렌스 디란디를 굳이 골라내어 파견한 것은 무언가 아무도 예상 못한 대형 사고를 쳐주기를 은근히 기대했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원래 상층부의 속내는 복잡미묘한 법이다.
꼬박 하룻밤을 언덕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불어닥치는 바람과 찍고 지우는 공방전을 벌인 끝에, 록온은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배째자고.
"미쳤군."
세츠나의 감상은 한결 짧고 가차없었다. 록온은 이곳에 온 후 두 번째로 어깨를 떨구었다.
"혹시 요즘 셰리프의 필수과목엔 한두 마디로 상대 박살내기도 들어 있는 거야? 나만 몰랐어?"
"길고 장황히 말해주길 바라나."
"어이, 그게 아니라아……사람이 밤새도록 머리를 쥐어짠 결과를 일도양단하지 말라구! 슬퍼지잖아!"
세츠나는 파이살 왕자의 <최대한 잘 봐줘서 어이없어 하는 시선> 못잖은 눈길로 팔을 휘저으며 항의하는 록온을 쏘아보았다.
"육로로 아카바를 습격하려면 네푸드 사막을 통과해야 한다."
"응."
"네푸드는 건널 수 없어."
"아, 아, 이의 있어요? 다들 불가능하다며 미리 겁먹고 설레발치던 장소를 넘고 건넌 예는 역사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알프스 봐라 알프스. 벌써 네 번이나 군대한테 밟히지 않았어."
"고작 알프스와 비교하긴가."
"고작이라뇨, 알프스가 웁니다."
록온은 장막 너머의 아득한 지평선을 가리켰다.
"아카바는 바로 저기. 총구는 전부 바다를 향해 있고. 가서 접수하기만 하면 돼. 뭐가 문제야?"
"육지 쪽으로는 접근할 수 없으니 전부 바다를 향했을 수밖에."
"바로 그러니까 기습하기엔 최고란 거 아냐. 터키애들이 어디 꿈이나 꾸겠냐고. 천혜의 요새는 지리적 이점이 한 번 무너지면 걷잡을 수 없어. 네가 간다면 난 기꺼이 뒤만 졸졸 따라갈 테니까. 에 또, 일단 쉰 명쯤이면 될라나."
"불과 쉰 명으로 아카바를? 더더욱 미쳤군."
"아까부터 미쳤다 미쳤다 연발하지 마라. 슬슬 형님 눈물나려 합니다. 쉰 명이 네푸드 원정에 성공하면 다른 쉰 명이 자연 따라오게 되어 있어. 더구나 저쪽엔 북부 호웨이타트 족도 있잖아."
"호웨이타트?"
반문하는 세츠나의 얼굴이 자못 험악했다.
"호웨이타트는 제 몫 챙기기에만 급급한 족속이다."
"대신 싸움에는 일가견이 있는 친구들이고."
"일가견이 있건 없건 알 바 아니야. 심지어 지금의 족장 알렐루야 아우다 아부 타이는 정신마저 오락가락하기로 악명이 높아. 그런 자들과 손을 잡는 건 곧 죽어도 사양이다."
퉁명스레 내뱉고는 할 말은 다 끝났다는 듯 세츠나는 매정하게 등을 돌렸다. 예상은 했지만 아니나다를까 예상대로였으므로 록온은 그닥 당황하지 않고 곧장 플랜 B로 이행했다.
"기다려, 세츠나."
아이답게 커다란 적갈색 눈동자가 또 뭐냐는 현저한 짜증을 담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이 바닥의 전설이다 뭐다 해도 역시 열 여섯이다 싶어 록온은 내심 웃음을 삼켰다. 지저분한 어른은 뒤에서 애타게 부르건 말건 제 할 말 끝났으면 미련 없이 자리를 뜨는 법이었다. 적어도 록온 스트라토스는 그리 할 터였다.
그리고 지저분한 어른답게 그는 망설이지 않고 히든카드를 뽑아들었다.
"넌 나한테 빚이 있을 텐데."
"……무슨 빚."
"내 안내인을 죽였잖아."
세츠나의 눈썹이 희미하게 꿈틀거렸다.
"하지미는 그곳에서 물을 마실 수 없다. 그 자도 알고 있었어. 그걸──."
"응, 하지만 덕택에 난 사막에서 미아가 될 뻔했다구."
우수하고 유능한 하로 컴퍼스가 제 구실을 해서 별 고생 안 했지만. 뒷말은 입속으로만 덧붙였다. 설득의 법칙 제 7조, 사실을 말하되 다는 말하지 말라.
무표정한 얼굴이 안면 근육 하나 움찔하지 않은 채 '직살나게 (삐──)한 놈' 색으로 물드는 것에 결코 개의치 않고, 록온은 효과 발군의, 한편으로는 업이 쌓여 훗날 등짝에 칼침 맞아도 항의 못할 낯짝이라 동생에게 가열찬 성토를 당하는 상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정확히는 '그러고 아무한테나 방긋방긋 웃어주고 다니다 열정을 주체 못한 변태들한테 돌림X 당했다고 새벽 세 시에 울면서 전화로 보고하진 말아줘. 내가 곤란해' 였다. 형을 사랑하지 않는 거냐!?)
그리고는 결정타를 날렸다.
"아랍 사나이라면, 한 일에는 책임을 져야지?"
"쉰 명을 데리고 어디를 갈 작정입니까?"
하리스 부족의 굳건한 사내들이 낙타 사이를 누비며 원정 준비에 골몰하는 동안, 새벽의 어스름 속에서 수행원을 동행한 파이살 왕자의 하얀 실루엣을 재깍 알아본 록온은 배시시 웃었다.
"기적을 만들러요, 왕자님."
"큰일을 하기에 앞서 신성모독은 좋은 징조가 못 됩니다. 삼가십시오."
짐짓 매섭게 면박을 준 파이살 왕자는 즉시 말문을 돌렸다.
"중령은 달콤한 꿈길을 헤매고 있더군요. 나는 물론 상관에게도 한 마디 없이 일을 진행하다니 이런 막나가는 독단깽판은 난생 처음 보겠습니다. 후에 군법회의에 회부되어도 난 모릅니다."
"계급은 위지만 직속 상관은 아니라는 핑계로 어떻게든 넘겨보려고요. 왕자님은 어찌 아셨습니까?"
"다 아는 수가 있습니다."
"세츠나겠죠?"
왕자는 단지 우아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이리 된 일이니 메카의 파이살 티에리아 이븐 후세인의 이름으로 아카바에 입성하는 걸 허용해 주시겠는지."
"거절하면 순순히 따를 의향이 있긴 있습니까."
"에~또, 좀 많이 곤란하니까 그냥 허락해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대면한 이후 처음으로 파이살 왕자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스름이 채 걷히지 않은 시각이었지만 록온은 확신할 수 있었다. 눈이 좋지 않으면 저격수는 해먹지 못한다. 물론 그 와중에도 대인배스럽게 오, 제대로 웃으면 더 귀엽겠구먼, 이란 생각도 빼먹지 않았고.
"조건이 있습니다."
"네."
"티에리아."
"에?"
"왕자님이고 뭐고, 앞으로는 티에리아로만 부르십시오."
"에엣?"
"경어도 집어치워요."
"에에에엣!!"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게 꼬박꼬박 경어를 쓰는 당신을 보노라면 지네 백 마리가 살갗 위를 슬슬 기어다니는 느낌이 들어요. 생리적으로 매우 불쾌합니다."
"……우와 넘해."
그래도 역시 왕자님한테 반말은 좀, 어쩌고 꿍얼대며 슬슬 낙타에 오를 채비를 하는 록온에게 파이살 왕자, 아니 본인의 요구에 따라 티에리아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이마에 손을 가져갔다.
"우리의 신 베다의 가호가 있기를."
반사적으로 답례 인사를 한 후에야 한 박자 늦게 얼레, 알라 아니었나? 란 고민에 일순간 사로잡힌 록온의 어깨에 희고 고운 섬섬옥수가 턱 얹혔다. 다음의 돌발 상황에 미처 제때 대응하지 못한 것은 인간으로서는 당연한 일이라고 믿고 싶다.
입술에 따스하고 보들보들한 무언가가 꽤 오래 맞닿았다 떨어졌다.
쩌저적 금이 간 록온을 향해 티에리아는, 시종들에 의하면 그들도 십(삐─) 년 본 역사가 없다는, 참으로 상쾌하기 그지없는 백만 불짜리 썩소를 날렸다.
"아랍은 미인을 찬미합니다. 하렘의 자리는 언제든지 비워놓지요."
"저기, 왕자님……!? 왠지 그저께도 비슷한 말을 들은 것 같은……!? 아니, 왕자님한테만은 그 말 듣기가……아니, 그보다 하렘이라니!? 자, 잠깐 잠깐! 어째서 승리에 찬 염화미소를 은은히 띤 채로 가 버리는 건데!? 대답! 대답은 하고 가! 티에리아! 티에리아!? 티에리아───────!!!!!"
이리하여 록온 스트라토스는 對 파이살 티에리아 이븐 후세인 왕자의 애칭 이벤트를 무사히 수료하였다.
1. 세츠나가 30초나 줄창 째려본 이유는 얼마나 제 취향인지 가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야)
세츠나의 취향 : 하얗고 뽀샤시하고 크고 예쁜 것. 예) 엑시아, 록온, 마리나 등등(...)
록온의 취향 : 작고 귀엽고 부비부비하기 좋은 것. 예) 하로, 세츠나, 티에리아, 펠트 등등(...)
티에링이 177이어도 록형보다는 아직 작지 말입니다 그리고 알렐이는 여기서도 은따지 말입니다(.......)
이 인간들 취향은 엑시아와 하로가 다 망쳤다. 그래 니네들 어떤 의미 하늘이 내려준 궁합 맞대니까? (가재눈)
2기에서 다스 쿠로디아가 제대로 염장만 질러주면 진짜 명예의 전당 올린다. 농담 아니다.
여담으로 알렐이의 취향은 잘빠지고 예쁘고 똑똑하고 나이 든 것. 예) 록온, 스메라기, (취지는 약간 어긋나지만) 할렐루야 등등(...)
(티에링은 취향이고 나발이고 베다 다음은 록형이 엄마 오리라;)
2. 우리의 사랑스런 빙구 해리 브라이턴 대령으론 콜라와 조슈아를 두고 박터지게 고민했지만 콜라는 마네킨 대령님 밑에서 꼬리 흔들며 학학대야 하지 말입니다.
그리고 콜라가 콜라 주제에 소위가 아니면 열받지 말입니다(...)
3. Voulez-vous coucher avec moi의 뜻은... 알아서 찾아보시길. (회피)
4. 아무래도 3편에서 알렐이 나오기는 그른 것 같다. orz
2013년 5월 13일 한 줄 더 추가. 그리고 정말로 3편에 나오지 못했다(.......)